[대한민국 스포츠 100년](3)야구와 축구, 정확한 도입시기는 언제일까?

정태화 기자| 승인 2020-02-14 14:39
제10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야구경기 모습
제10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야구경기 모습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부터다. 1866년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와 싸움을 벌인 병인양요, 1871년 아시아 팽창주의를 추진한 미국이 군함을 앞세워 강화도에 쳐 들어온 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고종의 등극과 함께 섭정을 한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실각하고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은 개화파들이 벌인 갑오경장을 계기로 서구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덩달아 근대 스포츠들도 하나 둘씩 조선에 도입되고 소개가 됐다.
대부분 근대 스포츠들은 기도교청년회(YMCA)를 통해 도입이 됐지만 야구와 축구의 경우, 도입 시기를 두고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해 혼선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야구는 YMCA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1905년 봄 YMCA 회원들을 중심으로 야구단을 창단한 것을 우리나라 도입시기로 하고 있다.

1901년 9월에 내한한 질레트는 2년여의 고생끝에 1903년 10월 28일 YMCA 창립총회를 열고 이해 11월 11일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을 임시회관으로 사용했다.

그 이듬해 여름(1904년) 어느날 질레트는 한국청년들이 미군 병사들과 어울려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보는 서구 문물에 취한 듯 캐치볼을 하는 한국 청년들의 얼굴에는 진지함, 흥겨움, 그리고 신기함이 넘쳤다.
이 모습을 보고 질레트는 한국청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면 쉽게 선교도 하고 YMCA 활동에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야구장비 도입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것.

질레트가 미국에 연락을 해 야구장비를 받은 것은 이해 겨울이었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가르치고 즐기기 위해서는 따뜻한 봄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봄인 1905년 봄, 질레트는 허성, 김연호, 김종상, 박덕상, 현동순, 현동진 등 청년 회원들을 중심으로 야구 룰과 장비 다루는 법을 가르치며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을 만들었다.

바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야구팀이 탄생했고 이것을 우리나라 야구 도입 시기로 인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질레트가 1902년 목회자들의 여름 철 수련 및 휴가 모임인 하령회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때 자신이 미국에서 쓰던 야구장비를 가져가 휴식시간에 참가자들과 캐치볼을 했고 나중에는 평양숭실학교 학생들도 끼여들어 함께 캐치볼을 하며 즐겼다.

또 1896년 4월 25일 오후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해병대원들이 야구경기를 한 내용을 독립신문 영문판에서 보도했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미국명 Phillp Jaisohn)가 제이손(Jaisohn)이란 이름으로 같은 해 6월 25일 미국인 팀 SAC(Seoul Athletic Club) 중견수로 출전해 미 해병대 팀과 경기를 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최근 발굴된 1899년 10월 대구에 부임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헨리 브루엔(Henry Munro Bruen·한국명 傅海利)의 일기에 따르면 자신이 한국에 오면서 야구배트와 공, 마스크, 글러브 등 야구 장비를 가지고 와 1900년 3월 25일 이갑성(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을 비롯해 김주호, 김학철 등 어린이들을 모아 소년야구단을 창단했다는 것. 하지만 이 기록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축구 도입시기에 대해서는 야구와 전혀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조선에 현대식 축구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전파됐는지는 정확한 근거자료는 없고 구전에 의할 뿐이다.

이 구전에 따르면 1882년 6월(고종 19년) 제물포에 영국 군함 '플라링 피시'호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입항했다. 당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절정기여서 서양인들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군함의 선원들이 선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허가도 받지 않고 제물포 부두에 들어와 볼을 차며 휴식을 취했다.

그러자 관가의 허락도 없이 상륙을 했다고 해서 조선 군졸들이 이들을 쫒아냈는데 경황중에 도망을 가던 승무원들이 볼을 그냥 두고 가고 말았다. 이때 볼을 주운 아이들이 영국 군함 승무원들의 흉내를 낸 것이 우리나라 축구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전이라면 정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인 7월이었다,

이번에는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제물포에 입항해 한성(서울)에 들어갈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조정의 허락을 받은 이들은 제물포에서 김포를 거쳐 곧바로 한성으로 오지 않고 우회해서 과천을 통해 서울로 오면서 쉬는 중간중간에 빈터에서 축구를 했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기하게 구경했다.

휴식이 끝난 영국 승무원들은 이 볼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주었고 영국인들이 떠난 뒤 이 공을 가지고 공터 등에서 공놀이를 했다. 이때를 즉 1882년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소개된 시기이자 도입된 시기로 보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축구 보급은 1905년 외국어학교에서 초빙한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한국명 마태을)이 5월 4일 동소문밖 봉국사에서 법어학교 운동회를 개최하면서 축구를 경기종목의 하나로 채택해 두 팀으로 나누어 경기를 한 뒤부터였다.

물론 1902년 배재학당에서 축구반이 만들어져 학생들끼리 축구를 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학교내에서 그쳤고 학교 축구로 발전한 것은 1905년 마르텔 이후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팀은 1906년 3월 11일 발족한 대한체육구락부였다.

대한체육구락부는 축구경기가 열리면 많은 회원들의 열띤 응원전도 벌어졌는데 이같은 모습에 흥미를 느낀 일반인들까지 가세해 응원을 하자 응원단을 통솔할 방법을 찾던 과정에서 질서정연한 응원이 가능하고 선수들의 사기도 올릴 수 있는 운동가를 만들게 됐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최최의 운동가였다.

“아세아주 례의방(禮義邦)은 우리 대한 분명하다.

청년들아, 동포들아, 2천만 동포들아,

부패기상(腐敗氣象) 다 버리고 활발용기(活潑勇氣) 내여 보세.

대한체육구락부는 유지동지(有志同志) 성닙(成立)하여

청년문의(靑年文誼) 돈목(敦睦)하고 체육운동 목적이다.

우리 신체 구건(求建)하니 문명정진 용감하다.

일심단체 굳게 되니 억만호조(億萬護鳥) 끼칠소냐.

산악같은 불변심(不變心)은 제국독닙 기초로다

수신제가(修身齊家) 근본되고 충군애국(忠君愛國) 강령(綱領)로다.

일등훈장 락훈(樂薰)롭고 류방면세(流芳面世) 불후(不朽)로다.

우리 황성 은(恩)으로 흥민동업(興民同業) 령일(令日)이다.

일난풍화(日暖風和) 좋은 때에 우리 운동 즐겁도다.

천세천세 천천세로 만세만세 만만세라.”(대한체육구락부 운동가)

이처럼 야구와 축구는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시기를 두고 서로 다른 잣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야구는 실제로 야구팀을 창단한 것을 우리나라에 도입시기로 보면 반면 축구는 말 그대로 영국 군함 선원들이 휴식을 하면서 심삼파적으로 축구경기를 한 것을 도입시기로 하고 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도입된 야구와 축구지만 도입시기에 대한 적용 잣대가 다르다보니 혼선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 도입시기에 대한 좀더 면밀한 연구와 함께 통일된 잣대를 만드는 작업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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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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