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8)일제 강점기의 지방체육 ②열악한 충청세에도 체육열기는 높아

정태화 기자| 승인 2020-05-28 13:04
1933년 조선체육회 주최하고 조선중앙일보가 후원한  제1회 전조선풀마라톤대회에서 충북 출신의 김성학이 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 김성학은 충북선수로 전국을 제패한 첫 선수였다.
1933년 조선체육회 주최하고 조선중앙일보가 후원한 제1회 전조선풀마라톤대회에서 충북 출신의 김성학이 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 김성학은 충북선수로 전국을 제패한 첫 선수였다.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남체육
충남은 1920년대 들어 서울이나 경기지역에서 각종 근대 스포츠가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대전을 중심으로 천안, 예산, 공주 등 군소도시를 중심으로 뒤늦게 체육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이는 충남에 대도시가 없고 군소도시만 있어 경제적 수준이 다른 지방보다 열악한 탓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전은 고작 일개 면에 불과했고 공주도 1931년에야 읍으로 승격할 정도였다.

이런 충남에 각종 운동경기들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4월 1일 창간해 지방운동경기를 적극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신문 보도의 영향으로 군이나 면에서는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이들 청년회는 체육부를 두어 체육활동을 장려함과 동시에 군민, 면민운동회를 개최함으로써 체육대중화에 앞장섰다. 여기에 조선체육회 창립과 전조선경기대회 개최는 지방의 체육열기를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충남은 1920년대에는 정구가 유행했다. 1920년 6월 6일 대전소학교 교정에서 남선정구대회, 7월 18일 홍성체육협회 주최 정구대회, 8월 3일 금산의 정구 축구단 42명이 대전으로 원정을 와 대전청년운동부원들과 경기를 벌인 것 등이다. 또 정구는 1921년 제1회 전조선정구대회에 예산구락부, 금산청년회가 참가했고 1923년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서는 공주 영명여고가 준우승, 제2회 대회에는 영명여고가 중학부에서 우승을 차지해 명성을 떨쳤다. 특히 제2회 대회에는 전국에서 지방 여고팀으로는 대전의 호수돈여고와 공주 영명여고 2개 팀만 참가할 정도였으며 1930년대에서 꾸준하게 정구 열기는 이어졌다.

1922년 공주고보가 개교하면서 단축마라톤대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강경상고, 예산농업고, 대전중학 등에서 교내체육대회를 열면서 육상이 시작됐고 1927년 3월 5일 대전체육회가 발족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활기 있는 체육활동이 전개됐다. 대전체육회는 충남소년야구대회, 전조선정구대회, 전조선우승컵쟁탈정구대회, 대전시민육상경기대회 등을 개최하며 충남체육 발전에 앞장섰다.

충남 체육은 1930년대에 나름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활기를 띤 종목은 야구였다. 도쿄유학생모국방문단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경기력을 향상시켰던 야구는 주로 학교체육이 주를 이루던 다른 종목과는 달리 대전철도팀, 대전야구단, 천안군청야구팀 등 10개의 직장 팀이 있어 열기가 드높았다. 대전철도팀은 1935년 10월 8일에 열린 제11회 조선신궁경기대회 야구경기 일반부 결승전에서 평남의 강자인 겸이포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본인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선인은 1~2명에 불과했지만 주전으로 활약했다.

열악한 도세에도 체육 열기는 높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도인 충북은 청주와 충주가 가장 큰 도시이지만 충남과 마찬가지로 도세는 약했다. 한강 뱃길과 육로 교통의 길목 노릇을 하던 충주는 1905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교통의 사각지대로 전락하면서 발전이 더욱 늦어지고 말았다. 반면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발전의 전기를 맞은 청주는 1908년 충주에서 도청소재지가 이전되고 1920년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지역발전이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밀러가 건립한 광남학교(현 청남초등학교 전신), 1907년 청주보통학교(현 주성초등학교 전신), 1011년 개교한 청주공립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 전신), 1924년 4월 19일 개교한 청주고등보통학교(현 청주중학교 전신) 등이었다.

충북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식학교들의 교과과정에 체조를 정식으로 채택했고 근대스포츠 도입과 발맞춰 야구, 정구, 축구 등을 육성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른 지역에 견주어 늦은 편이었다. 일제의 방해로 실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체육회가 지방 체육 보급을 명목으로 전국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예선대회 개최지, 참가지역 등을 명시한 ‘지방체육회 조직안’에 충남북과 강원도만 빠져 있는 것만 보아도 당시 그 지역들의 체육 열기나 열악한 도세를 실감케 해준다.

1925년 4월 12일 충북체육협회가 발족했으나 이는 일본인들이 주도해 만든 조선체육협회의 관제조직으로 충북 체육의 일반화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신 충주, 음성, 진천, 제천, 괴산, 영동, 황간, 옥천, 보은 등에서 지역별로 구락부나 체육회를 구성해 자체적으로 활동을 했다. 1925년 10월 25일 청주체육회가 청주시민대운동회, 1931년 5월 24일 괴산체육협회의 괴산시민체육대회 등 진천 마라톤대회, 보은 개인중부정구대회, 옥천체육회의 전조선개인정구대회 등을 개최한 것이 대표적인 체육활동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1928년 11월 18일에는 청주공립보통학교에서 열린 중선축구대회에 청주청년축구단, 서원축구단, 괴산축구단, 청주고보축구단, 조치원축구단, 청주농고축구단 등이 참가한 것으로 미루어 축구가 충북 전 지역에 성행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전국을 처음으로 제패한 충북 선수는 1933년 조선체육회가 처음으로 주최한 제1회 전조선풀마라톤대회(종로 견지동~의정부 망월사 왕복)에서 2시간46분38초로 우승한 김성학이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김은배가 6위를 차지하면서 전국적으로 마라톤 붐이 불때였다. 김성학은 그 뒤에도 중장거리와 단축마라톤에서 손기정 등과 1~2위를 다투었던 전국적 육상스타였다.

레슬링에서는 도쿄유학생인 곽동윤이 충북 레슬링뿐만 아니라 한국 레슬링 역사의 장을 펼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곽동윤은 1938년 전일본아마추어레슬링주니어선수권을 획득하고 1939년 미·일 레슬링 대항전에 일본대표로 출전한 뒤 전일본레슬링선수권마저 석권했다. 이어 1939년 서울 YMCA에서 한국아마추어레슬링 창설 당시 코치로 활약하고 일본, 호주, 필리핀 등 국제대회에 일본대표로 참가해 우승하고 도쿄유학생 레슬링 선수단의 주장으로 서울에 와서 전조선군과 경기를 벌이는 등 레슬링 보급에 큰 공적을 남겼다.

충북은 전국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많지 않았지만 1933년 10월 12일 진천에서 구성된 상산구락부는 중선축구대회, 진천·오창·증평대항축구대회, 남선소학교축구대회를 열고 소학교축구단을 조직해 증평, 음성, 무극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또 전진천 대 전음성 대항 야구대회를 개최하고 일반인들의 정구와 축구, 빙상경기 향상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여기서 중선, 남선이란 말은 조선체육회 창립과 더불어 전조선대회가 개최되자 이를 본 떠 조그만 고을에서도 ‘전조선’을 붙인 각종 체육행사가 자주 열렸으나 ‘전조선’이란 이름의 전국규모대회가 조금 벅차다 싶으면 ‘북선’ ‘남선’ ‘중선’ ‘호남’ ‘영남’ 등으로 지역을 좁혔다. 여기서 ‘중선’이란 ‘중조선’, 남선이란 ‘남조선’을 줄인 말이다. 전조선은 ‘전선’(全鮮)이라고 불렀다.

1933년 6월 5일에 창립한 제천체육회는 회원 98명이 공동경작으로 생긴 수익금으로 경비를 충당하며 인근 강원도 원주, 횡성, 영월과 충북 충주 단양 연합으로 중조선정구대회와 시민위안대회를 겸해 1만m 도보경주대회, 자전차경주, 기타 육상경주 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 괴산에서는 1929년 5월 14일에는 축구단에 이어 1932년 11월 15일 회원 10명으로 괴산 역기단도 창단했다. 괴산역기단이나 축구단의 활동상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아쉽기가 그지없다.


※잘못된 기사 항의에 대해 해명드립니다.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7)일제 강정기의 지방체육 ①야구로 꽃피운 인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1899년 인천영어야학회(현 인천고 전신) 1학년인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는 2월 3일 자 일기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황성기독교청년회 미국인 선교사인 질레트가 1904년에 야구를 소개했다는 기록보다 무려 6년이 앞서고 있다."는 글에 대해 독자분께서 잘못된 기사라고 항의를 하셨습니다. 이분은 1896년 4월 28일 자 독립신문 영문판에
“4월 25 오후 2시 30분,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 근처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팀 이름 : Seoul Athletic Club)과 미국 해병대원들(팀이름 : U.S.S. Yorktown)이 야구 경기를 벌여, 해병대 팀이 1점 차로 승리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내용과 함께 Seoul Athletic Club 팀의 선수 명단에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한 선수가 Philip Jaisohn으로 <독립신문> 발행인인 서재필 박사의 미국식 이름이어서 일본인 학생이 인천에서 야구했다는 기록보다 3년 일찍 서재필 박사가 야구를 했다는 글을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 3번째 '야구와 축구, 정확한 도입시기는 언제일까'에서 다루었으니 이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일본인 학생 ~~" 이 부분은 인천에 이런 적도 있었다는 표현을 했을 뿐이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야구를 전래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혹 표현 방법에서 마치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야구 전래을 한 것처럼 느끼셨다면 이는 전달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필자의 책임이므로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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