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100년](49)마라톤이야기⑩'조선인 2명을 대표로 내 보낼수 없다'

정태화 기자| 승인 2020-11-29 11:56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불과 2달반 정도 앞두고 일본에서 열린 마라톤대표 선발전에서 남승룡이 1위로 달리고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불과 2달반 정도 앞두고 일본에서 열린 마라톤대표 선발전에서 남승룡이 1위로 달리고 있다.
올림픽 개막 2달반 남겨놓고 최종선발전 연 일본의 얄팍한 속셈

1936년 5월 21일 베를린올림픽 출전 일본 마라톤 대표 최종 선발전이 메이지신궁 경기장과 로쿠고바시(六鄕橋) 사이의 공식코스에서 열렸다.

출전선수는 일본육상경기연맹이 이미 1935년에 최종대표로 선발해 놓은 손기정 남승룡을 비롯해 스즈키, 이케나가, 이오아쿠 등 8명과 전국 14개 지역에서 선발된 신진 13명 등 모두 21명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 3명을 베를린올림픽에 최종적으로 파견키로 했다.

8월 1일에 개막하는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개막을 불과 2달 반 남겨놓고 선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교통사정이나 시차, 그리고 현지 적응훈련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5~6개월 전에 올림픽 출전 선수가 결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육상경기연맹이 이렇게 최대한 늦게 최종선발전 일정을 잡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조선선수로 대표 팀 두 자리를 내 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남승룡을 제외할 명분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최대한 늦게 올림픽 최종 선발전을 치른다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베를린에 가서 다시 평가 기록회를 가져 최종 출전 선수를 확정한다는 얄팍한 계획이었다.

이런 일본육상경기연맹의 속셈은 양정고보,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근무하면서 조선육상경기연맹을 대표해 일본육상경기연맹과 접촉하고 있던 정상희에 의해 속속들이 알려졌다.

정상희는 “왜놈들이 지난 올림픽 마라톤에서 참패한 것은 조선 선수가 두 사람이나 끼어 있어 팀워크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그래서 이번 최종 선발전에서는 일본의 스즈키와 시오아쿠를 우선적으로 뽑은 다음 손기정과 남승룡 둘 가운데 하나만 보낼 계획이야.”라고 손기정에게 알려주었다. 지난 올림픽 마라톤 참패 라고 한 것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츠다가 5위,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7위를 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기정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 선수 둘 중에 하나가 빠진다면 지난 선발전에서 4위를 한 남승룡이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최종 선발전에서 남승룡이 1위를 하지 않는다면 올림픽 출전은 좌절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손기정은 남승룡을 1위로 만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남승룡에게 그 작전을 미리 노출할 수도 없었다. 남승룡이 레이스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도록 해야만 했다.

드디어 최종 선발전이 시작됐다. 이날은 기온이 25도를 웃돌았다. 마라톤을 하기에는 더운 날씨였다. 선수들은 더위로 페이스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서 달리기를 꺼렸다. 최종 선발전에서 기록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3위까지 순위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손기정은 레이스가 시작되자 홀로 치고 나갔다. 그 뒤를 스즈키와 시오아쿠가 허겁지겁 쫒았다. 그러다가 남승룡이 쫒아오기가 버거울 정도가 되면 페이스를 늦추었다가 남승룡이 따라 붙으면 다시 일본선수들을 달고 페이스를 높였다.

“그날 나는 처음부터 질풍처럼 달렸다. 나를 놓칠세라 일본선수들이 쫒아왔다. 몇 차례인가 이렇게 당겼다고 늦추고 하다 보니 그들이 지친 게 분명했다. 후반 남승룡이 선두로 나서면서 ”어이 손, 정신차려, 딴 놈들이 다 녹은 모양이야“하고 소리쳤다.”

손기정은 이 당시 상황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지만 남승룡에게 1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는 평소에도 부인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파견 마라톤 일본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남승룡과 손기정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36년 5월22일자 3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 파견 마라톤 일본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남승룡과 손기정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36년 5월22일자 3면〉


여하튼 승부는 가려졌다. 남승룡이 2시간36분5초로 1위를 하고 손기정이 2시간38분2초로 2위, 3위는 스즈키(2시간39분41초), 4위는 시오아쿠(2시간40분20초)가 차지했다.

남승룡이 지난 선발전 4위에서 1위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최종 선발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표 결정을 망설였다. 이틀 뒤에야 열린 일본육상경기연맹 기술위원회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남승룡이 비록 최종 선발전에서 1위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기록이 좋지 않았고 이번에 1위를 한 것도 다른 선수들의 컨디션 난조 때문이니 대표에서 탈락시켜야 한다고 일본육상관계자들은 주장했다.

이런 억지주장에 조선육상경기연맹을 대표해 참석한 정상희는 “최종 선발전의 상위 입상자 3명을 올림픽 대표로 뽑겠다는 것은 일본육상경기연맹의 공약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1위 남승룡을 안 보내고 누구를 베를린에 보내겠다는 겁니까?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선수에게 어찌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겠소”라고 강한 반론을 펼쳤다.

아무도 말이 없는 이 때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 세단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 육상계의 큰별 오다 미키오(織田幹夫)가 “그의 말이 옳다. 남승룡은 선발전 우승으로 실력을 확인해 주었으며 그를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 한마디로 대세는 결정됐다. 일본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오다는 매사에 공정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절대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남승룡은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손기정, 남승룡, 스즈키, 시오아쿠 네명을 베를린에 보내 현지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갖고 세 명을 출전시킨다는 조건이다. 일본은 마지막까지 조선인 두 명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만큼 그들은 조선인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불만이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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