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여자배구, ‘나는 작은 새’ 조혜정과 올림픽 첫 동메달

이신재 기자| 승인 2021-01-10 08:24

여자배구가 단체 구기 종목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섰다. 여자배구의 도쿄 출전은 막판에 이루어졌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헝가리전(왼쪽). 당시 주전 공격수였던 조혜정 GS감독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헝가리전(왼쪽). 당시 주전 공격수였던 조혜정 GS감독
원래 참가자격은 얻은 나라는 북한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IOC가 신흥국 경기대회를 문제 삼자 개막 직전 선수단을 철수시켜 버렸고 덕분에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이 대타로 기회를 얻었다.

대한민국 여자배구는 참가 6개팀 중 6위를 기록했다. 참가에 의의를 둘 수 밖에 없었지만 여자 배구는 도쿄의 실전 경험을 바탕 삼아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한 단계씩 진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메달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단체 구기종목 메달주자가 되었다.

□ 여자배구의 흥미로운 진화

여자배구는 흥미로운 진전을 보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다. 북한 대신이었다. 북한은 IOC가 신흥국 경기대회를 문제 삼자 개막 직전 선수단을 철수시켜 버렸고 덕분에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이 대타로 기회를 얻었다.

성적은 보잘 것 없었다. 참가 6개 팀 중 6위였지만 여자 배구는 도쿄의 실전 경험을 바탕 삼아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한 단계씩 진화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메달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단체 구기종목 메달주자가 되었다.

자력으로 출전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5위를 한 후 4년 뒤인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선 4위를 기록했다. 이제 메달과의 거리는 단 한걸음. 원래 마지막 한 걸음이 어려운 법인데 끈기의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감격의 동메달을 획득하고야 말았다.

‘날으는 작은 새’ 조혜정을 앞세운 대한민국호의 유경화, 유정혜, 이순복, 변경자,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은 불굴의 투지로 승리의 경기를 써 내려 갔다.

예선 첫 경기 상대 소련은 전력상 이기기 힘들었다. 그러나 완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한 세트를 따냄으로써 졌지만 희망을 안겼다.

그야말로 악착같은 플레이였다. 그들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다 죽어가는 공을 건져내며 풀세트 접전 끝에 강적 쿠바를 3-2로 눌렀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투지와 팀웍이 한 여름날의 강렬한 햇살처럼 빛났다.

그래도 또 하나의 높은 산이 남아있었다. 독일이었다. 힘이나 키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경기는 해봐야 아는 것. 이번에도 대한민국의 ‘낭자’들은 젖먹던 힘까지 다하며 3-2의 신승을 거두었다.

예선전적 2승1패로 조2위를 기록한 대한민국 여자배구의 메달밭 마지막 문턱은 헝가리였다. 역시 쉽게 이길 수 없는 난적이었다. 더구나 예선 2경기를 5세트까지 끌고가서 이기는 등 3경기에서 총 14 세트를 뛴 뒤라 선수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고 했던가. 애를 썼지만 첫 세트를 12-15로 내주고 말았다.

사실 이 때 여자배구팀의 멤버는 최상이 아니었다. 국가대표 에이스 공격수인 윤영실이 올림픽 직전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올림픽에 나서지도 못할 뻔 했다. 윤영실없는 대표팀은 전력은 잘해야 90% 정도.

온전한 전력으로도 메달 희망이 밝지 않았기에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은 출전불가를 결정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여자배구는 ‘팀웍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러면 없던 힘도 날 것’이라며 체육회 관계자들을 설득, 간신히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우여곡절끝의 올림픽. 또 이대로 메달 문턱에서 넘어지는 가 했으나 비관은 금물이었다. 어디에서 그렇게 힘이 솟아나는지 ‘태극낭자’들은 2세트에 접어들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윤영내의 그림 같은 토스를 조혜정과 유경화, 그리고 대타 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인 변경자가 연달아 공격을 퍼부으며 15-12로 이겼다.

일단 고비를 넘기자 상황은 급변했다. 한국은 손발이 척척 맞았으나 상대의 악착함에 기가 질린 헝가리는 실수가 잦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른 공격을 이어간 우리 팀은 3세트를 15-10으로 잡았다. 4 세트, 15-6이었다.

1세트 패배 후 3세트를 내리 따는 대 대역전극, 동메달이었다.

대한민국 여자 배구팀은 그렇게 구기종목 메달밭을 일구었고 최초의 여성선수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배구팀의 동메달 결정전은 TV로 중계되었다. 마지막 점수를 따내는 순간 전 국민이 환호성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고단한 서민의 삶을 한 순간이라도 잊게 해준 감동의 청량제였다.

대한민국의 왼쪽 공격수 조혜정은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그녀는 공격수 중 최단신이었다.

□ ‘날으는 작은새’ 조혜정

조혜정의 키는 165cm. 배구를 하기에는 너무 작은 키였다. 세터라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조혜정은 왼쪽 공격수였다. 당시 올림픽에 나온 외국팀 공격수들의 키는 적어도 175cm는 됐고 각팀의 에이스들은 180cm를 훌쩍 넘었다.

한뼘 이상의 키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서전트 점프력은 무려 60cm로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배구선수 100여명 중 최상위급이었다.

조혜정은 부산 동래초등하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세터로 시작했으나 부산여중, 숭의여고를 거치면서 공격력을 극대화했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에 뽑혔다.

조혜정의 이후 7년 이상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을 시작으로 1972년 뮌헨 올림픽, 1973년 월드컵,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과 세계배구선수권대회, 1975년 아시아선수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77년 월드컵까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한국 여자배구를 견인했다.

위력적인 서전트 점프로 화려한 플레이의 대명사가 된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 후 스타 플레이어가 되었지만 세계 배구계는 일찍부터 그를 주목했다. 1973년 월드컵 여자배구는 그의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

소련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여자배구는 소련,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조혜정만은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혀 베스트 오버 베스트가 되었다. 세계 배구인들은 서전트 점프로 20cm의 높이를 극복하는 그에게 ‘날으는 작은 새’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조혜정은 숭의여고를 졸업한 후 국세청을 거쳐 무적의 대농(미도파)시대를 열었다. 1977년 월드컵을 마친 후 은퇴, 이탈리아로 건너가 2년 간 선수로 뛰다가 국내로 들어와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조혜정은 1981년 야구선수 출신으로 프로 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감독 대행을 지낸 조창수씨와 결혼, 스포츠 커플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딸은 훗날 골프선수로 활약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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