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301] 왜 SL 벤피카라고 말할까

김학수 기자| 승인 2021-02-23 07:53
 포르투갈 프로축구팀 SL 벤피카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득점왕 에우제비우를 배출한 명문구단이다. 사진은 벤피카 선수들이 시즌을 앞두고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벤피카 홈페이지 캡처]
포르투갈 프로축구팀 SL 벤피카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득점왕 에우제비우를 배출한 명문구단이다. 사진은 벤피카 선수들이 시즌을 앞두고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벤피카 홈페이지 캡처]
SL 벤피카(Benfica)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명문 축구단이다. 안전한 항구라는 의미인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이 연고지이다. SL 벤피카는 ‘스포르트 리스보아 에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의 약자이다. SL은 리스본의 포루투갈어인 리스보아 스포츠클럽이라는 뜻이며 벤피카는 리스본의 북부 지역의 동네 이름이다. 보통 줄여서 약칭으로 벤피카라고 말한다.

리스보아와 벤피카라는 정식 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벤피카는 원래 두 팀이 합쳐서 만들어졌다. 1904년 리스본 서남부의 젊은이 24명이 ‘그루푸 스포르트 리스보아(Grupo Sport Lisboa)’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후 1906년 ‘그루푸 스포르트 벤피카(Grupo Sport Benfica)’와 손을 잡으면서 ‘스포르트 클루브 지 벤피카(Sport Clube de Benfica)’로 이름을 바꿨다. 두 클럽은 한 이름으로 활동하면서도 서로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다. 클럽 이름이 SL 벤피카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SL 벤피카는 우리나라와 가장 깊은 인연을 가진 유럽축구의 대표적인 팀이다. 1970년 9월 벤피카의 역대 최고 선수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득점왕 출신 에우제비우가 활동할 때 내한해 당시 국가대표팀인 청룡(1진)과 백호(2진)과 친선경기를 가진 바 있다. 경기 결과는 백호가 0-5로 대패했고, 청룡은 당시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이회택이 1골을 먼저 넣었지만 에우제비우가 페널티골을 성공시켜 1-1로 비겼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단일팀을 취재하기 위해 갔을 때,벤피카 임원이었던 에우제비우와 인터뷰를 갖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왼쪽은 필자.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단일팀을 취재하기 위해 갔을 때,벤피카 임원이었던 에우제비우와 인터뷰를 갖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왼쪽은 필자.


아프리카 모잠비크 출신의 에우제비우는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돌풍을 일으킨 북한과의 경기에서 3골을 기록하며 5-3으로 승리를 이끌고 포루투갈을 4강까지 이끌었다. 에우제비우는 지금으로 말하면 바르셀로나 리오넬 메시, 유벤투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공격수였다. 1965년 에우지비우는 포르투갈 클럽에서 뛴 선수로 발롱도르 상을 받은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포르투갈의 국민영웅이기도 한 에우제비우는 총 614경기ㅣ에 출장해 638골을 기록했다. 한 경기 당 평균 1골 이상을 넣은 셈이다. 2014년 심장마비로 타계한 에우제비우는 아직도 벤피카 최다골 기록 보유자로 남아 있다. 에우제비우와 함께 당시 내한한 벤피카 주전 가운데는 2000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냈던 움베르투 코엘류도 포함돼 있었다.

SL 벤피카는 현재 손흥민이 소속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훗스퍼의 조제 모리뉴 감독이 처음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던 팀이기도 하다. 1999-2000시즌이 끝나고 유프 하인케스가 벤피카 감독직을 사임한 뒤 후임으로 모리뉴가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구단 수뇌부와의 충돌로 인해 9경기만에 팀을 떠났다. 2년 뒤 FC 포르투 지휘봉을 잡은 모리뉴 감독은 2002-03시즌 UEFA 컵, 프리메이라리가, 포르투갈컵 우승을 모두 차지했으며 2003-04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컵을 거머줘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SL Benfica는 현재는 FC 포르투에 다소 뒤지지만 예전 화려한 성적을 올렸다. 숫자로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기록적인 37 번의 프리메이라리가 타이틀과 20개 이상의 포르투갈컵 트로피를 획득했다. 이는 라이벌인 FC 포르투와 스포르팅 리스본을 넘어서는 기록이다. 1933년 포르투갈 리그 창립멤버로 참여한 이후 현재까지 1부리그에서 강등되지 않았다.

최고의 전성기는 1960년대 초반이다. 에우제비우가 이끈 벤피카는 1956년부터 5연속 유럽축구 정상에 차지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무적시대를 마감시키고 최강자로 등극했다. 유러피안챔피언클럽스컵(현 챔피언스리그)에서 1960-61시즌 유벤투스와 191-62시즌 바르셀로나를 결승에서 각각 꺾고 2연패를 차지했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사령탑은 헝가리 출신의 벨라 구트만 감독이었다. 유럽축구를 2년 연속 평정한 구트만 감독은 구단에 선수단의 연봉을 인상해줄 것으로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뒤 팀을 떠나면서 “앞으로 100년 동안 벤피카는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이른바 구트만의 저주이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보스턴의 베이브 루스가 뉴욕 양키스로 떠난 뒤 밤비노의 저주로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처럼 벤피카는 그가 떠난 이후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을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구트만의 저주 바로 다음해에 3년 연속으로 유러피안챔피언클럽스컵 결승에 올랐지만 AC 밀란에 1-2로 역전패를 당한 이후 현재까지 우승 기회를 갖지 못했다.

벤피카는 1990년대까지 라이벌팀들에 밀리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구단 재정이 호전돼 다시 예전의 영광을 상당부분 되찾았다. 벤피카는 예전의 화려한 명성을 등에 업고 바르셀로나에 못지않은 소시오를 갖고 있다. 2004년부터 소시오 정책을 실시하며 회원 모집에 나선 벤피카는 2006160,398명의 유료 회원을 보유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포르투갈 프로축구팀은 유럽 빅리그에 비해 인기에 밀리며 선수들을 배출하는 셀링 리그(Selling League)’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벤피카를 비롯 FC 포르투 등이 좋은 성적을 보여주며 경쟁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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