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64)올림픽 참가를 위한 염원①조선올림픽대회 개최

정태화 기자| 승인 2021-02-24 13:43
1946년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5일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옮림픽대회 입장식 모습. [사진 경향신문 캡쳐]
1946년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5일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옮림픽대회 입장식 모습. [사진 경향신문 캡쳐]
런던올림픽 참가준비위원회 구성

일제 압제를 벗고 광복이 된지 3개월여만인 1945년 11월 26일 조선체육동지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조선체육회로 태어났다. 1920년 7월 13일 창립한 뒤 한민족의 구심체 역할을 하다 1938년 7월 4일 일제의 횡포에 스스로 산화의 길을 택한 조선체육회의 맥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조선체육회는 이듬해인 1946년 2월 26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범민족적 지도자로 임원진을 대폭 보강한데 이어 4월 15일에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다. 이 말은 잃어버린 한반도 산하를 되찾았지만 정부도 없고 좌우의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이때 체육인들은 이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체육인으로서의 할일에만 매진했다는 뜻과도 통한다. 바로 그 일은 2년 앞으로 다가온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였다.

체육인들은 세계 최대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되찾은 민족의 특권이자 기쁨이라고 믿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뛰었고 그에 대한 민족의 울분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졌기에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한민족 모두의 염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올림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체육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선수단의 일원으로 두 차례나 올림픽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이상백에게 부탁했다. 이상백은 27세의 나이로 일본체육협회 최연소 이사 자리에 오르고 행정의 최고 사령탑인 전무이사까지 역임했으니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1946년 7월 15일 런던올림픽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유억겸, 부위원장에 전경무 이상백, 위원은 이병학 천갑진 이운용 민원식 박길룡 조병학 정상희 정상윤 박인덕 박삼규 안철영 김정연으로 짜여졌다.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NOC가 구성되려면 국내경기단체가 5개 종목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이미 구성돼있는 육상 축구 권투 역도 농구 자전거 등 6개 경기단체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내 아마추어 규정과 함께 각 국제경기단체에 제출해 가입절차를 밟았다.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자전거연맹은 이미 1945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과 세계사이클연맹(UCI)에 가입했고 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은 1946년 세계복싱연맹(AIBA)에, 조선농구협회와 조선역도연맹은 각각 1947년 국제농구연맹(FIBA)과 국제역도연맹(IWF)에, 조선축구협회는 1948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했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당시 올림픽 출전을 지상과제로 삼을 정도로 의욕을 보였던 것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이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의 금메달과 동메달이 일제의 핍박에 신음하던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처럼 태극기를 앞세운 런던올림픽 출전으로 갈래갈래 찢기고 분열된 사회를 단합시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런던올림픽대책위원회 구성과 함께 올림픽을 겨냥한 대표선발전을 시작했다. 종목별로 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회가 연달아 개최되면서 체육계 전반이 활기를 띄었다.

전국육상선수권대회와 손기정 세계제패기념 조선일보 마라톤선수권대회가 창설됐고 조선농구협회는 1946년 3월 종합선수권대회를 출범시켰다. 조선배구협회는 이 해 4월에 춘계리그, 5월에는 종별선수권대회를 신설했고 조선탁구협회는 시도대항대회와 종합선수권대회를, 조선역도연맹은 전국선수권대회를 창설했다.

또 조선아마추어레슬링협회는 1946년 11월 전국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빙상경기협회는 춘천 소양강에서 제1회 종합선수권대회를, 조선스키협회는 이듬해 전국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아이스하키는 협회 출범 전인 1946년 경복 중동 용산 배재중 팀이 결성돼 친선경기와 리그전을 벌였다.

1946년에 열린 조선올림픽대회 여자 단거리 출발 직전의 모습
1946년에 열린 조선올림픽대회 여자 단거리 출발 직전의 모습
올림픽 참가 염원 담은 조선올림픽대회 개최

1946년 10월 16일부터 5일 동안 서울에서는 조선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지금으로 치면 제27회 전국체육대회였다. 16개 종목, 4950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는 이승만과 미 군정청 러취 장관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승만은 축사를 통해 “가슴에 뚜렷하게 태극기를 붙이고 내 이름 석자로 세계 강국과 어깨를 같이 해 우리의 의기를 선양할 선수 제군의 노력에 감사하고 건투를 빈다.”고 말했다. 또 러치 장관도 “조선을 세계에 똑바로 인식시키는 길은 손기정 선수에서 보듯이 스포츠가 지름길이다.”라며 참가선수들의 선전을 당부했다.

런던올림픽 대책위원장 유억겸은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20일 경향신문에 ‘조선체육계에 기(寄)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선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밝혔다.

"한 국가의 소장(消長)이 그 국민의 기백의 강약에 달려있음은 사승(史乘)과 현실이 증명하여주는 바이다. 그러면 국민의 견인불발의 기백은 무엇으로써 함양할 수 있을까. 자연환경을 비롯하야 가진 각색의 문물제도에 연유하야 함양함이 적지 않다고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그 국민의 체위의 향상을 도모함으로서 소기의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다. 곧 건전한 신체라야 건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으며 따라서 견인불발의 기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견인불발의 기백을 가진 국민이라야 그 조국을 잘 지킬 수 있으며 또 그 조국을 번영케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우리 체육계에서는

() 여하한 종류의 운동경기일지라도 국민체위의 향상을 도모키 위하여 이의 대중화를 주창하는 동시에 우수한 경기자 선수를 대량으로 양성하여 분야에 따라 대중체육을 지도케하는 일편 국제경기장, 예를 들면 1948년에 열릴 제14회 세계올림픽대회에 보내어 승리의 영광을 조국에 돌리도록 힘쓰기를 바라며

() 경기자나 지도자를 막론하고 운동경기를 통하여 인격을 도야하며 공정한 행동을 하는 습관 단결력 인내심 용() 진력(進力) 판단력 희생심 준칙심을 배양하고 사생활에 뿐만 아니라 공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진가를 발휘하기를 바라며

() 만난을 무릅쓰고 우리 체육계가 비교적 질서 정연히 발전되어 감을 보고 듣고 생각할 때마다 체육인(경기자급 지도자)들에게 감사하며 경복(敬服)하는 바이다. 그러나 치밀한 과학적 연구 없이는 진정한 체육의 발전을 기필(期必)할 수 없으니 체육인들은 운동경기 실연에만 열중치 말고 부단히 연구에 힘써 사도(斯道)의 정상적 발전향상에 더욱 노력하기를 열망하는 바이다."

또 조선체육회는 이 조선올림픽대회에 맞추어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의 '조선올림픽 노래'를 발표했으며 경향신문에서는 이 노래 보급을 위해 3만장의 악보를 만들어 관람객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떨치자 세상에 우리의 의기를
퍼치자 세상에 우리의 슬기를
조국의 명예를 짊어진 우리들
다리는 가볍고 마튼 짐은 무겁다
보아라. 젊은 조선의 모습
우리 올림픽

만들자 새기록 우리의 힘으로
세우자 새나라 우리의 단결로
싸우던 벗들과 손잡고 나가는
우리는 자유와 평화의 사도들
보아라. 젊은 조선의 모습
우리 올림픽" [※ 당시 표기를 그대로 사용]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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