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62. 잉글랜드의 전설- 동양의 진주 박두익

이신재 기자| 승인 2021-03-08 06:45
북한 남자 축구의 과거는 화려했다. 북한은 남한보다 12년 늦게 월드컵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첫모습이 워낙 강렬해 세계 축구계에 그 이름을 바로 각인시켰다.

그 유명한 북한 축구의 사다리전법. 키가 작아 서로 밀어올려서 헤딩공르 따낸다는 설명이지만 사실과 다르다. 사진이 묘하게 그렇게 찍혔을 뿐이다.
그 유명한 북한 축구의 사다리전법. 키가 작아 서로 밀어올려서 헤딩공르 따낸다는 설명이지만 사실과 다르다. 사진이 묘하게 그렇게 찍혔을 뿐이다.

1965년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FIFA는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3대륙에 달랑 티켓 1장만을 배정했다. 이에 반발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가 불참, 결국 남은 나라는 한국과 북한, 그리고 호주 3개국 뿐이었다.

참가국 수가 줄어든 바람에 굳이 지역 예선을 할 필요가 없어져 3개국이 바로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다투게 되었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남과 북이 축구를 통해 우열을 가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축구 경평전’이 후 처음으로 열릴 듯 했던 남북 축구대결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공정서가 극에 달했던 시절, 북한 축구가 상승세에 있음을 안 대한축구협회와 정부 관계자들이 ‘북에 지는 것 보다는 나가지 않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당시 주로 아시아권이었지만 국제대회에서 29연승 행진을 하고있었다.
북한의 전력은 예상대로 강했다. 북한은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두 경기를 모두 손쉽게 이겼다. 남한이 버겁게 여기고 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1차전에서 6-1로 대파한 후 2차전에서도 3-1로 손쉽게 이겼다.

북한의 기동력은 상당히 뛰어났고 팀웍 역시 대단했다. 아무리정신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만약 대적했더라면 십중팔구 남한의 패배로 끝났을 터였다. 패배는 면했지만 그대신 대한민국 축구는 출전포기로 FIFA(국제축구연맹)에 벌금 5천달러를 내야만 했다.

베일에 쌓인 평균신장 165cm의 볼품없는 북한은 4조에 속해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8강전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한은 소련 등 3강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약체로 평가 되었다. 소련과 이탈리아가 8강에 진출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소련. 최강팀으로 북한이 꺾기 어려운 팀이었다. 소련이 3-0으로 쉽게 이겼다. 소련은 3전승으로 8강에 올랐다.

2차전은 칠레. 전 대회 3위국으로 전문가들은 역시 북한의 패배를 점쳤고 칠레가 전반 먼저 1골을넣었다. 어렵지 않은 승부라고 봤지만 북한의 전력은 만만찮았다. 스피드와 투지를 앞세운 공격 축구로 칠레를 끝없이 위협했다.

슈팅수는 북한이 오히려 많았다. 16-9로 북한이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공격적이면서도 골을 잡지 못했던 북한은 후반 43분 박승진이 동점골을 터뜨려 1-1 무승부를 만들었다.

생각 밖의 전력에 모두들 놀랐지만 북한의 돌풍은 더 이상 힘들 듯 했다.

3차전은 이탈리아였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북한이 힘겹게 비긴 칠레를 2-0으로 여유있게 이긴 팀이었다.

가볍게 본 북한은 그러나 의외로 강력했다. 경기를 하면서 실력이 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공격수 리베라를 중심으로 쉴새 없이 북한을 압박해 들어갔으나 골을 터뜨리지는 못했다.

득점 없이 답답한 경기가 이어지던 전반 34분 이탈리아의 지아코모 불가렐리가 박승진에게 태클을 걸다 오히려 발을 삐는 부상을 입고 아웃되었다. 이 대회까지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 선발 출장한 선수는 무조건 전 경기를 다 뛰어야 했다.

선수 1명이 빠져 10명이 싸워야하는 이탈리아. 박두익, 한봉진, 김봉환, 양성국을 주축으로 이탈리아 골문을 두드리던 북한의 몸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전반 42분, 하정원이 헤딩으로 중앙 쪽에 밀어준 공을 박두익이 땅볼 강슛을 날려 이탈리아 골문을 열었다.

먼저 1골을 내줬지만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북한의 밀집대형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이탈리아는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자 스탠드를 가득 메운 2만여명의 영국 관중들은 투혼의 북한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고 승리한 북한 선수들은 국가와 노동가 등을 부르며 한동안 운동장에서 승리의 세레머니를 했다.

이탈리아는 1승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 서둘러 짐 보따리를 쌌다. 북한은 첫 출전한 월드컵에서 비유럽, 비남미국가 중 유일하게 8강행 열차에 올랐다. 일찌감치 귀국길에 오른 이탈리아 선수단은 팬들의 분노가 두려워 공항을 바꿔가며 이른 새벽 돌아갔으나 기다리고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때 선보인 'AGAIN 1966'이나 ‘토마토가 익어간다’는 글귀의 플래카드는 이 때의 사건에서 착안, 만들게 된 것이었다.

월드컵사에 일대파란을 일으킨 북한은 8강전에서도 포르투갈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경기 시작 23초만에 나온박승진의 30미터 중거리 슛, 21분 이동훈의 슛, 그리고 22분 양성국의 슛으로 전반 22분에 이미 3-0이었다.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북한의 4강은기정사실로 여겨졌다. 하지만 포르투갈에는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가 있었다.

그는 전반 27분 추격을 알리는 첫 골을 넣은뒤 전반 42분, 그리고 후반 11분과 16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려 0-3의 경기를 순식간에 4-3으로 뒤집었다. 포르투갈은 후반 33분 아우구스토의 헤딩골로 5-3, 대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4강 문턱에서 좌절을 맛 보았지만 8강의 역사를쓴 북한 축구대표선수들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포르투갈전에서의 엉성한 패배로 질책을 받지는 않았다. 당시 남한에선 포르투갈전 역전패로 숙청되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잉글랜드 월드컵 수훈으로 ‘동양의 진주’로 불렸던 모란봉 체육단 소속의 박두익과 월드컵 첫 골의 박승진은 1966년 10월 인민체육인이 되었고 이동훈, 이찬명, 임성휘, 하정원, 한봉진, 김봉환, 양성국은 공훈체육인으로 뽑혔다. 명례현감독과 연승철, 노택림 코치 역시 공훈체육인의 특혜를 받았다.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의 불똥은 남한에 튀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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