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9)신여성의 스포츠활동(중)

정태화 기자| 승인 2020-03-2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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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도의 배화여고 수업후 운동하는 모습[사진 배화백년사에서]
첫 여성운동회 주도한 진명여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 운동회는 1907년 5월 25일 장충단에서 열린 연합운동회로 진명여학교를 설립한 엄준원 교장의 제의로 이루어졌다. 황성신문은 이틀 뒤인 5월 27일 연합운동회 기사를 보도하면서 진명여학교를 비롯해 신학원(新學院), 양규의숙(養閨義塾), 상동여학교(尙洞女學校), 화성여학교((華城女學校),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간호원(看護院) 등 7개 학교에서 236명이 참가해 여러 운동을 펼쳤는데 개국 이래 초유의 일대 행사였다고 말했다. 일등을 한 학생에게 상품을 줄때마다 군악이 연주되었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학교의 연합운동회는 황제가 예식과장을 직접 보내 상품을 하사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일반인 후원자들이 연필, 공책 등을 기증했으며 구경 온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아 주최 측은 학부에 청원해 헌병사령부, 경무청의 순검 각 20명씩이 나와 삼엄한 경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해 10월 26일 훈련원에서 실시된 관공사립학교 추계연합운동회, 이듬해인 1908년 5월 21일 성내 관·사립학교 비원운동회가 열리는 등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여학생들에 대한 운동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그만큼 여학생들의 체육활동이 활발해 졌다는 증거인 셈이다.

비원운동회의 여학교 성적은 1등에서 3등까지 진명의숙 학생으로 정소군, 김석은, 이경희였으며 4등은 양규의숙 성의자, 5등은 명신여학교 왕희수였다. 이들 입상자들에게는 1등에 은시계, 우산, 가죽가방 각 1개씩, 2등에 은시계와 우산 1개씩, 3등은 우산과 가죽가방 1개와 수첩 4개, 4등에는 우산과 가죽가방 1개씩, 5등에는 가죽가방 1개와 수첩 2개를 각각 수여했다.

이처럼 연합운동회는 1년에 네 차례(4월, 6월, 9월 10월)씩 실시하는 등 운동회 열풍이 불었는데 참가학교들은 대부분 관립과 기독교계 학교를 제외한 사립학교들이었다. 이러한 한국인 학교의 운동회는 외국인학교, 특히 기독교계 여학교들의 화류회가 갖는 성격과는 기본적으로 달랐다. 기독교계 여학교들의 화류회는 말 그대로 소풍의 성격이 강했지만 한국인의 운동회는 단결심, 협동심을 통해 체력을 양성하는 민족주의운동 목적으로 발전했다.

황제 어명으로 열린 특별운동회
여학교 운동회 열풍은 사립여학교인 진명, 숙명(당시는 명신), 동덕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순종 황제와 순정효 황후가 직접 참관하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특히 순정효 황후는 1908년 5월 1일 순종의 칙령에 따라 관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가 설립되자 아직 학생 모집도 하지 않은 학교에 휘지를 직접 내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생각건대 역대 임금께옵서 문교를 숭상 장려하셔 선비는 백행(百行)을 닦고 여자는 삼덕(三德)을 숭상하여 나라가 평화롭고 가정이 화목하더니 세습이 날로 강쇠(降衰)하고 실학이 점차로 미약해져 우리나라의 문명이 마침내 세계에서 후진하게 되었으니 심히 개탄하는 바이니라. 광무 유신 이래로 이를 이름 아파하여 신학을 일으키시고 이에 황제 등극 후에 그 성지를 이어받아 실지로 시행하시니 학교가 성하게 일어나고 자녀가 분려하니 실로 국가를 위하여 경하할 바이나 이는 남자에 그칠 뿐이요, 여자 교육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그 시행이 없으니 어찌 결전(缺典)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보통교육은 남녀의 구별이 없으니 여자는 출가하여는 남편을 돕고 가정을 다스리며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녀를 부육하는 책임을 지고 항상 가정의 중심이 되어 일가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추진하여 국운을 비보함이 또한 클지니 국가가 어찌 여자 교육을 중요시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친히 스승을 찾아 교육을 받았으며 일반 여자로 하여금 나를 표준케 하기를 기하더니 정부가 이제 고등여학교를 한서에 창설함은 나의 뜻을 이름이라, 그 부형된 사람은 그 뜻을 잘 이해하여 그 여아로 하여금 구습을 버리고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게 할지니라. 이는 나 개인 한 몸만을 위할 뿐이 아니라 실로 성지를 우러러 받듦이니 모름지기 힘쓸지어다.”<경기여고 100년사>

순정효 황후는 휘지를 내린 이튿날인 1908년 5월 21일 순종황제와 함께 서울 사립학교 대운동회에서 선발된 440명 학생(여학생 129명 포함)이 참가해 창덕궁 비원 안 광장에서 열린 비원특별운동회를 참관했다. 순종은 무관학교 생도들의 기계체조와 운동회를 관람한 뒤 “짐이 오늘 이 운동회를 지켜 본 것은 교육 장려를 위해서이다. 오늘의 운동회에 만족하는 바이며 앞으로 더욱 배움에 힘쓰라”라며 은시계 10개, 연필 400타, 우산 20개, 황모필 600자루, 먹 300개, 수첩 600권, 가죽가방 20개를 상품으로 하사했다.

황후가 여성들의 교육 필요성을 강조하고 한편에서는 사립여학교들이 운동회를 수시로 열었으나 남녀유별의 봉건관념이 순식간에 불식될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으니 이는 바로 한성고등여학교의 궁궐에서 가진 어전 운동회였다.

“1909년 5월, 어느 화사한 봄날, 어명이 내리어 대궐 안에서 한성여고의 운동회를 열라는 것이었다, 장소는 창덕궁 비원 안, 옥류천이 맑게 흐르고 잔디가 곱게 깔린 뜰이었다. 평소에 훈련과 연습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준비하기에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운동회 경기종목도 평소에 닦아오던 달리기, 뜀뛰기, 공 던지기, 간이도수체조 등이었다. 이채로운 종목이라면 그네뛰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운동회 날은 매우 화창한 봄날씨였으며 황제, 황후폐하께서 운동경기의 진행을 어람하셨다. 양 폐하께서는 경기의 진행에 따라 미소를 보내 주시기도 하고 박수를 가볍게 치시기도 하였다. 운동회가 끝난 뒤에는 황후께서 부럽다고 치사까지 하시며 이조 왕실의 가문인 이화가 새겨진 벼룻돌을 기념품으로 하사하셨다.”<경기여고 60년사>

한성고등여학교의 어전 운동회는 신교육과 여자 교육을 반대하는 보수파에서 “대궐 안 어전에서 여학생들이 반나체 모습의 불손한 차림으로 요염하게 교태를 부렸다”고 막말을 하며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지만 황실에서 여자들의 신식교육에 절대적인 후원의 뜻을 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공공연하게 여학생들의 체육활동이나 몸차림을 비난하는 여론을 잠재우는 데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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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양장을 입은 윤고라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여자운동회를 주관했다.
여성으로 첫 여학교 운동회 주관자 맡은 신여성 '윤고라'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함께 여성운동도 시작됐다. 1906년 순천군의 서현여자학회가 주최한 순천군 여학교 운동회, 1908년 4월 24일 자선부인회 춘기운동회는 여성 단체들이 주최한 운동회들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의 여학교 운동회는 국권회복 운동의 하나로 열린 것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윤고라가 1910년 5월 14일 삼선평에서 열린 사립여학교 운동회를 총체적으로 맡아 운영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순현황귀비인 엄비, 배정자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양장을 가장 먼저 입은 여성으로 알려진 윤고라는 원래 이름은 김고라였다. 그녀는 외교관인 아버지 김윤정을 따라 미국 워싱턴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개 구혼한 윤치오와 결혼해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 여자학원을 졸업했다.

윤고라는 1899년 귀국하면서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롱 드레스에 가슴에는 레이스가 다양하게 꾸며진 양장에다 새의 깃털로 장식된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당시 유럽의 최신 패션인 낮은 굽의 구두를 신어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있으면 꼭 자신을 ‘윤코리아’라고 소개해 ‘윤고려’라고도 불린 여성교육운동가였다. 당시 개화여성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 바꾸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한국여성의 개화된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1908년 초 황후의 휘지를 받들어 황족 부인과 각 대신부인들이 운현궁에 모여 조직한 대한여자흥학회의 사무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11월에 양심여학교를 창립하고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뒤에는 양원여학교 교장과 영어교사, 양심여학교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잡지의 효시인 여자교육회 총재인 이옥경이 간행한 ‘여자지남’의 속간 사업을 돕는가 하면 1909년 여성용 교과서인 ‘여성수신교과서’(노병선 저)의 감수를 맡는 등 여성 의복 개량운동, 여성 교육을 위한 다양한 사업에 참여하고 공헌했다.

남편 윤치오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던 윤치호의 사촌동생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작은 아버지다. 윤고라는 이런 윤치오의 둘째부인이었다. 윤치오는 학부 학무국장을 하는 동안 우리나라 교육행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체육단체 결성, 1908년 4월 여자교육회 총재인 이옥경의 주선으로 간행된 우리나라 여성 잡지의 효시인 ‘여자지남’의 사장을 맡기도 했다. 또 그는 1908년 9월 이희두와 함께 청년과 대중 체육발전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체조 단체로 군인체육기관인 무도기계체육부를 조직해 습사, 승마, 유술, 격검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윤고라가 이렇게 활발한 여성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윤치오의 위치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립여학교 운동회를 주관할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여성운동의 기수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1913년 12월 28일, 23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녀가 사망한 뒤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는 1915년 3월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에 흡수됐다.

여학교 운동회, 여성체육 대중화 이끌어
이화학당이 1886년 첫 여학교로 개교를 한 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에 많은 기독교계 여학교와 사립 여학교들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여학교들이 첫 운동회를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2년 뒤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한 축으로 모자 보건과 위생, 그리고 여성들의 체력 배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과정에서 여학교 운동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신문화 영향에다 여성단체의 등장, 여성들의 지위향상 등이 여학교 운동회를 실시하는데 크게 작용했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국가의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운동회는 많은 학생들과 수 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 애국가 제창, 만세삼창 등과 더불어 참가 귀빈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족의식 각성을 역설하는 민족운동회 형태로 발전되었다. 여성연합운동회는 남학교의 운동회보다는 간단한 규모였지만 그 맥은 남자운동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학교로서의 한계도 함께 드러냈다. 당시 여학교 운동회에 참가한 대부분 여학교는 서울이라는 특별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 수도 여성인구에 비해 극히 적었다. 여기에다 여학교 연합운동회는 기독교계 여학교들이 철저하게 배제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강제합병을 눈앞에 둔 일제의 한반도 교육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908년 학부령 제9호 고등여학교령에서 “체조는 보통체조 및 유희로 하되 보통체조는 교정술, 도수체조 및 기타의 체조로 함”이라고 하였다. 이전까지 해오던 병식체조를 제외한 것이다. 얼핏 보면 연약한 여성에게 병식체조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목적에 어긋나 이를 시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식체조를 통해 상무적 정신을 육성하는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이는 친일교육 강화를 위한 일본인 교사배치, 그리고 민간 사립여학교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교류 억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독교계 여학교들은 서구 근대체육과 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당연히 민간 사립여학교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교 연합운동회에 기독교계 여학교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일제의 교류억제책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기독교계와 민간 사립학교들이 교류를 할 경우 남녀평등,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로 인한 배일사상의 전파를 두려워했고 이를 위해 기독교의 비정치화 노선을 채택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명분삼아 민간사립학교와의 교류를 막은 것이다.

1933년 10월 숭의여학교에서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한 운동회에서 ‘단심주’라는 매스게임이 선보였는데 이 단심주는 ‘단결하면 아름답고 흩어지면 약해지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에 한몫을 했다. 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35년 6월 24일 학급대항경기를 열었고 해마다 연중행사로 10월, 또는 11월초에 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유희 또는 댄스라고 불린 무용을 각 학년 단위로 한달 가량의 연습 끝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운동회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반 시민들이 관중으로 참여하고 이들의 후원으로 더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운동회는 학교체육이라는 제도적인 틀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들까지 체육을 보급시키고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면서 사회체육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또한 여학교들의 운동회는 남성과는 다른 여성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여성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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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도 경기여고 라디오 체조 모습[사진 경기여고 100년사에서]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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