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11)조선체육회 전신은 고려구락부가 맞다, 아니다

정태화 기자| 승인 2020-03-31 11:19
조선체육회의 전신으로 논란이 되고 있ㅆ는 고려구락부가 인천에서 한용단과 경기를 했다. 사진은 1920년대 중반 한용단 야구단 모습[사진 인천야구 한세기에서]
조선체육회의 전신으로 논란이 되고 있ㅆ는 고려구락부가 인천에서 한용단과 경기를 했다. 사진은 1920년대 중반 한용단 야구단 모습[사진 인천야구 한세기에서]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전신)가 출범했다. 조선체육회가 우리나라에서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체육단체는 당연히 아니다. 이보다 앞서 많은 체육단체들이 창립되었다가 사라지곤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인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1906년 3월 11일 창립), 그리고 임시정부 교통총장,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낸 노백린이 발기한 대한국민체육회(1907년 10월 15일 창립), 체육을 모든 학문의 핵심이라고 규정한 대동체육구락부(1908년 8월 창립),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몇개 단체를 통합해 만든 대한흥학보(1909년 1월 창립) 등이 조선체육회 이전에 체육단체로 존재했었다.

이들 단체들의 공통점은 "개인이 약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개인이 약하면 자연히 나라도 약해진다"는 논리로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데 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은 생명이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수없지만 제대로 체육사업도 벌이지 못한채 유야무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단체들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단체가 있다. 바로 고려구락부다. 고려구락부가 언제 창립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 고려구락부를 조선체육회의 전신이라고 보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쪽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고려구락부는 1920년 6월 7일 매일신보에서 '고려구락부 조직, 운동을 목적삼아 체육을 장려'라는 제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경성부로 말할 것 같으면 수도인바 시내에 기거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의지를 상통하며 모든 행동을 같이할 만한 집회가 없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어 서로서로 외로운 것을 부르짖으며, 그뿐 아니라 항상 이 세상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 끌리어 타락하는 경향이 없지 아니하던 바, 이번에 시내에 있는 모든 유력한 청년 몇 사람이 뜻을 일으켜서 이름을 <고려구락부>라 하여 일종의 청년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는데, 대개 말하면 운동에 힘을 써서 전조선을 대표할 만한 운동단을 만들 터인데 그 회안에 장차 운동단을 말하면 베이스볼과 풋볼 및 빌리야드(당구) 등이라 하는 바, 지난 5일 하오 7시부터 종로 청년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모든 것을 의논하였는바, 혈기 방자하고 전도가 유망한 시내에서 굴지하는 청년 40여 명이 모여서 취지 설명과 신·구 사항에 대하여 질의가 있었는데, 지금이 마침 금융공황이 심한 고로 당분간 별로이 완전하게 하지 못하고, 우선 베이스볼단만 두어 가지고 해 나가기로 되며, 그에 대한 간사와 회 창립에 관한 위원 12명을 선거한 후, 9시 30분 경에 산회하였는데 장래에는 상당한 적립금을 세워 가지고 훌륭한 구락부가 될 듯 하더라”

이어 매일신보는 20일쯤 뒤인 6월 26일 4면에 '베이스볼 운동'이라는 기사에서 "오는 27일 일요일에 경성에서 새로이 조직된 고려구락부가 인천에 내려가서 인천에 또한 새로이 조직된 의용단과 베이스볼 경쟁을 할터인데 오전 9시부터 인천관측소 아래 운동장에서 되리라더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보다 이틀이 지난 6월 28일에는 동아일보에서도 '고려구락부'가 등장한다.

“조선체육회의 발전을 실현하려고 조직하였던 고려구락부는 이번에 그 범위를 일층 확장하기 위하여 조선체육회라는 기관을 설립하려고 지난 이십육일 하오 일곱시 명월관 지점에서 창립위원 고원훈씨 외에 십명의 창립위원이 모여 취지서와 규칙서를 제정하고 여러 가지의 설립 방침에 대하여 협의가 있은 후에 폐회하였는데 창립총회는 오는 칠월 사일 오후 네시에 역시 명월관 지점에서 개회할 터인데 총회에는 각 지방의 발기인들도 다수 출석하여 자못 성황을 이루리라더라”

그리고 매일신보는 조선체육회가 창립총회를 가진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 금일 심삽일 밤 중앙예배당에서 회의'라는 기사에서 다시 '고려구락부'를 들먹였다.

“사람도 또한 원래는 하늘을 뚫을 만한 손과 무의 웅건함과 창공에 비치는 명쾌한 날빛과 공중에 나는 날랜 새들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나, 그러하나 이제 이 조선동포들 중에는 얼굴빛이 창백하며 몸은 버들가지와 같이 가늘어서 기운이 없어 보이고 정신이 혼미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는 자기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찌하여야만 회복하여 웅장한 기품을 지닐 수가 있을까. 그는 다만 운동을 장려할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에는 조그마한 운동단체들은 보이는 모양이나, 사회적 기관이 될 만한 운동단체가 없던 바, 본지에도 누누이 보도한 바 있거니와 우리 사회의 명망가들이 모여서 고려구락부를 조직하였다가 이번 다시 그 범위를 한층 확장하여 전조선을 대표할 만한 운동회로 고쳐서 이름을 조선체육회라 하고 고원훈·장덕수·박중화씨 등 우리 사회에서 이름이 혁혁한 명사 90명의 발기로 수 삼차 발회가 있어서 모든 것을 원만히 협의한 후에 이달 30일 오후 8시부터 종로 문안 중앙예배당에서 창립총회를 할 터인데, 당일은 규칙통과와 임원선거가 있은 후, 그 자리에서 일반에게 입회를 허락할 터인바, 뜻있는 사람은 아무쪼록 다수 참석하기를 바란다더라.”

이렇듯 고려구락부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서 잠깐 언급한 것으로 더 이상 기록이 없다. 무엇보다 이 기사만으로는 고려구락부가 언제 창립되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하지만 기사의 전체 문맥으로 미루면 고려구락부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지 직전에 임시조직 비슷하게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고려구락부를 조선체육회 전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하지만 조선체육회가 7월달에 창립총회를 가지기 위해 발기인, 창립취지서, 회칙 등에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굳이 한달 전에 별도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데도 의문이 생긴다. 또한 조선체육회 발기인이 생존해 있는 동안 어느 누구도 고려구락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봐도 고려구락부를 조선체육회의 전신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여전히 고려구락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나 다름없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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