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어 기문(旗門)은 ‘기 기(旗)’와 ‘문 문(門)’을 써서 ‘깃발로 표시된 문’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원래 근대 스키 경기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문은 본래 깃발로 표시한 군영의 문이나 출입구를 가리키는 용례가 있었다. 발상 자체는 스키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이 말은 등장하지 않지만 중국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병법서 ‘손자(孫子)’에는 군대가 진을 치고 출입하는 문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붙인 주석에는 “軍門為和門,左右門為旗門”, 즉 군영의 문을 설명하면서 좌우의 문을 ‘기문(旗門)’이라고 했다. 후대의 주석에서도 이 표현은 반복해서 인용된다.
우리나라 언론은 스키 기사에서 기문이라는 말을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쓰고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57년 2월16일자 ‘스포—츠 全國(전국)스키—大會戰績(대회전적)’기사에서 이 말이 등장한다. 이 자료가 중요한 이유는 ‘기문’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 때문이 아니다. 실제 한국 스키 현장에서 이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대의 신문 기록이라는 점때문이다.
오늘날 기문을 당연한 스키 용어로 받아들이지만, 언어는 사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가 실제로 정착했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당대의 기사, 경기 결과, 규정, 지도서 같은 자료를 살펴봐야 한다.
이 사실은 스포츠 용어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새로운 스포츠가 등장했을 때 반드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존재하던 언어 속에서 그 스포츠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스키의 기문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산 위에 코스를 만들고 선수에게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점을 표시해야 했을 때, 두 개의 폴과 깃발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말 그대로 하나의 ‘문’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문은 깃발로 표시되어 있었다. ‘깃발로 만든 문’이라는 오래된 한자어가 새로운 스포츠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다시 쓰인 것이다.
여기에서 영어와 한자어의 사고방식이 흥미롭게 만난다. 영어권에서는 핵심 기능에 초점을 맞춰 gate, 즉 ‘통과하는 문’이라고 부른다. 한자어에서는 그 문을 구성하고 있는 특징까지 표시해 旗門, 즉 ‘깃발로 표시된 문’이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언어가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 각각 다른 부분을 이름에 담은 셈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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