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를 어린 아이 보듯 하다. 병사를 사랑하는 자식처럼 보면 깊은 계곡에도 따라 들어가고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프로야구 손자병법] 24 장종훈과 시졸영아(視卒嬰兒)](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50508382702870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창단 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를 맡아 정신없었던 배성서 감독은 그 와중에도 한 선수에게 자꾸 쏠리는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야구를 했다지만 기본 틀이 잡혀 있지 않아 장래를 기약할 수 없었던 18세 장종훈이었다.
그는 연봉 6백만원에 입단, 팀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전이 되기엔 여러 가지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배 감독은 내심 ‘물건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능성 보다는 그의 성실한 태도 때문에 생긴 연민의 정에 가까웠다.
그렇게 마음 먹은 배 감독은 주전들의 훈련 뒷마무리를 위해 장비를 챙기고 있는 장종훈에게 다가가 한마디를 던졌다.
“열심히 해봐라. 프로는 실력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주전으로 못 뛰는 것이 아니다. 선배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시간 없다고 하지마라. 집이든 어디든 지쳐 쓰러질 때 까지 훈련해라. 다. 달밤에 체조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거”
옥상에 올라가거나 동네 공터를 찾아 반드시 하루 1.000번 이상의 스윙을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손에 잡힌 물집이 터져 너덜너덜해져도 방망이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덤벼들었다. 굳은 살이 박혀 더 이상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좁은 방안에서 맨손 스위을 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머릿속에 맴도는 이미지 스윙을 하곤 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타격 폼이 잡혔고 스윙속도가 빨라졌다. 그야말로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취월장이었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사기진작 용 멘트를 날렸던 배 감독은 매일 매일 달라지는 장종훈을 보면서 ‘물건이 다 됐구나’고 느꼈다. 그리곤 아직 멀었다는 코치들의 말을 뒤로 한 체 장종훈을 대타로, 대수비로 기용하면서 경기 감각을 익히도록 한 후 선발진에 넣었다.
1987년 4월 14일 대전 해태전. 장종훈은 유격수에 8번 타자로 나선 장종훈은 2루타를 터뜨렸다. 18세에 쏘아올린 프로 첫 안타였다. 그날 장종훈은 유격수로 실책도 저질렀고 타자로서 삼진도 당했지만 볼넷을 고르기도 했고 2타점을 올려 팀의 3-2승을 이끌었다.
그렇게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땡감처럼 떫었던 장종훈. 배감독은 그가 타석에 들어서기 위해 방망이를 잡을 때 쯤 불러 세워놓고는 작전 지시를 하는 척하며 히프를 치거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격려를 하곤 했다. 장난을 치며 몸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 중 한명인 장종훈. 그의 시작은 그렇게 아주 작았으나 ‘한화 이글스의 영원한 35번’ 으로 프로야구 무대에 통산1,950경기, 홈런 340개, 안타 1,771개, 타점 1,145점, 타율0.281의 대기록을 남겼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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