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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스포츠 브레인] "볼넷만은 안 돼" 되뇌는 순간, 뇌는 볼넷을 조준한다

제궤의혈(堤潰蟻穴), 천 길 둑은 개미구멍에서 무너진다

2026-11-09 05:44:02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삼성 라이온즈가 어제(8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KT 위즈를 12-1로 꺾고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섰다. 1차전을 내준 뒤 네 판을 내리 가져간 시리즈였다. 그런데 다섯 경기를 되감아 보면 같은 장면이 되풀이된다. 병살로 끝날 송구가 빗나가고, 잡힐 뜬공이 떨어지고, 볼넷이 또 볼넷을 불렀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절대 더듬지 말자"를 되뇔수록 첫 문장부터 꼬였던 기억,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는 이 현상을 '아이러니 효과'로 설명했다. 출발점은 단순한 실험이었다. "하얀 곰을 떠올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좀처럼 하얀 곰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웨그너에 따르면 뇌가 "하지 마"라는 명령을 처리할 때는 두 직원이 함께 일한다. 원하는 동작을 해내는 실행 직원, 그리고 금지된 일이 벌어지는지 살피는 감시원이다. 감시원은 힘을 거의 들이지 않고 자동으로 돌아가지만, 일하려면 '금지된 장면'의 그림을 늘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반면 실행 직원은 집중력을 꽤 많이 먹는다. 평소엔 실행 직원이 힘이 세서 별일 없다. 그러나 긴장과 압박으로 머릿속 작업대가 좁아지면 실행 직원이 먼저 지치고, 감시원이 들고 있던 그 그림이 몸을 끌고 갈 수 있다. 웨그너 연구진의 1998년 퍼팅 실험에서 "목표 지점을 넘기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여섯 자리 숫자를 외우는 부담이 함께 주어지자 오히려 목표 지점을 넘기는 실수를 더 자주 했다. 여기에 실수가 하나 더해지면 "다음엔 절대 안 돼"라는 금지 명령이 한 겹 더 쌓인다. 실수가 실수를 부르는 연쇄는 그렇게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그런 장면이 이어졌다. 조짐은 1차전부터 있었다. KT가 8-0으로 앞서던 경기가 7회와 8회를 거치며 8-7, 한 점 차까지 좁혀졌다. 2차전 연장 12회초 1사 1·2루에서는 병살로 이닝을 닫을 수 있던 땅볼의 1루 송구가 빗나갔고, 2루 주자가 결승점을 밟았다. 3차전 KT 선발 소형준은 안타 3개만 맞고도 볼넷 5개를 내주며 4점을 잃었다. 그제 4차전에서 KT 투수진은 사사구 12개를 내줬다. 한국시리즈 한 경기 한 팀 최다 기록이다. 1회말엔 우익수가 놓친 뜬공에 주자 셋이 홈을 밟았다.

이강철 감독은 경기 뒤 "원래 볼넷을 가장 적게 내주던 팀"이라며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어제 5차전 5회말에는 실책 3개가 겹치며 한 이닝에 8점을 내줬다. 정규시즌 창단 첫 90승을 거둔 팀의 기술이 며칠 만에 사라졌을 리는 없다. 주장 장성우도 시리즈를 마친 뒤 충분히 쉬었고 경기 감각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기술은 그대로인데, 그 기술을 꺼내 쓰는 뇌의 조건이 달라졌을 수 있다.

실수는 옆 사람에게 번질 수도 있다. 실책 뒤 마운드의 투수는 '이번엔 내가 막아야 한다'는 짐을, 다음 타구를 기다리는 야수는 '나까지 놓치면 끝'이라는 짐을 하나씩 더 지기 쉽다. 금지 명령이 한 사람의 머릿속을 넘어 그라운드 전체로 퍼질 수 있는 셈이다.

같은 시리즈 안에는 반대 장면도 있었다. 소형준은 3회부터 6회까지 매 이닝 삼자범퇴로 막아 냈다. 삼성도 깨끗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 2차전까지 7경기에서 실책 12개가 나왔고, 2차전 10회말에는 1루수 디아즈가 땅볼을 놓쳐 만루 위기를 만든 끝에 동점을 내줬다. 그 디아즈가 연장 12회초 상대 송구가 빠지자 멈추지 않고 홈까지 내달려 결승점을 올렸다. 4차전 5회초 1사 만루에 오른 이재희는 삼진과 내야 뜬공으로 이닝을 끝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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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트링 부상에도 출전한 주장 구자욱은 지명타자로만 나서 20타수 10안타를 쳤고, 기자단 투표 97표 중 72표를 받아 시리즈 MVP가 됐다. 그들의 머릿속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스포츠심리 현장에서 흔히 권하는 방법은 이렇다.

첫째, "볼넷 주지 마"를 "미트 바깥쪽 낮게"처럼 해야 할 동작으로 바꿔 말한다. 둘째, 머릿속 짐을 덜도록 신호어는 짧게 하나만 둔다. 셋째, 실수 직후엔 지나간 공이 아니라 다음 공 하나에 주의를 묶는다. 이 시리즈가 스포츠심리학에 남긴 문장은 하나다. 압박 속 목표는 '피할 것'이 아니라 '할 것'으로 적어야 한다. 물론 이는 결과를 안 뒤에 붙인 해석이고, 실책에는 피로와 타구의 질 같은 우연도 얽혀 있다.

『한비자』 유로편에는 천 길 둑도 땅강아지와 개미가 뚫은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는 구절이 있다. 제궤의혈(堤潰蟻穴)이다. 같은 대목은 백규가 둑을 돌며 작은 구멍부터 막았기에 물난리를 겪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이강철 감독도 시리즈를 돌아보며 2차전에서 끝낼 기회를 놓친 대목을 아쉬워했다. 한 시즌을 버틴 둑도 구멍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운명이 갈릴 수 있다.

동호회 리그의 내야수든, 주말 라운드의 아마추어 골퍼든, 월요일 아침 보고를 앞둔 직장인이든 뇌의 작동 원리는 같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스스로에게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번 주 가장 긴장되는 순간 직전에 "실수하지 말자" 대신 "무엇을 하자"를 한 문장으로 적어 본다면 어떨까. 지금 당신의 둑을 지키는 문장은 '하지 마'로 시작하는가, '하자'로 시작하는가?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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