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뱅크샷 어원은 영어 ‘bank’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bank는 은행이 아니라 ‘벽면·둑·반사면에 튕기다’라는 의미다. 풀이하면 뱅크샷은 벽이나 면을 이용해 반사시켜 넣는 샷을 뜻한다. 당구에서는 특히 ‘한 쿠션 뱅크’, ‘더블 뱅크’, ‘크로스 뱅크’같은 식으로 발전했고, 한국에서는 이를 통칭해 뱅크샷이라 부르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당구장에서 영어식 표현인 뱅크샷과 일본식 잔재 표현인 ‘가라쿠’가 동시에 쓰였다는 것이다. 즉 같은 기술을 두고 공식·현대식 표현은 뱅크샷으로, 구세대 당구장 은어로 가라쿠가 공존해온 셈이다.
한국 당구 문화는 해방 이전과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일본식 용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당구 자체가 일본을 통해 대중적으로 유입된 데다, 기술 용어 역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다마’, ‘히네리(ひねり)’, ‘히까키(ひっかき)’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본 코너 1779회 ‘왜 아직도 '당구공'을 ‘다마’라고 부를까‘, 1787회 ’당구에서 왜 ‘회전’을 ‘시네루’라고 말할까‘, 1789회 당구에서 ‘걸어치기’를 왜 ‘히까키’라고 부를까 참조)
가라쿠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이 명확하게 정리돼 있지는 않다. 다만 당구계에서는 몇 가지 설이 오래전부터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일본식 표현이 한국식 발음으로 변형되었다는 설이다. 단순한 일본어가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가 섞여 만들어진 당구 은어라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자료에 따르면 일본어로 ‘비어 있다’라는 뜻인 ‘가라(から, 空)’와 영어 ‘cushion(쿠션)’의 앞부분 ‘쿠’가 합쳐져 가라쿠(から + cu) 가 됐다고 한다. 쿠션을 맞고 돌아 나오는 궤적을 설명하는 일본식 용어가 세월을 지나며 가라쿠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어원의 정확성보다도, 이 말이 ‘쿠션을 이용해 돌아 들어가는 샷’이라는 감각적 의미를 공유하는 현장 언어로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본 코너 1776회 '당구에서 왜 ‘쓰리쿠션(three cushion)’이라 말할까' 참조)
당구는 유난히 ‘구전 문화’가 강한 스포츠다. 정식 교본보다 선배의 한마디가 더 오래 남는다. 당구장 말들은 기술 이전에 리듬과 분위기를 전달한다. 당구장 특유의 생활 언어인 셈이다.
특히 40~60대 세대는 일본식 용어에 익숙하다. 새로운 대한체육회식 순화 용어가 나와도 몸에 밴 표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뱅크샷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가라쿠 간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재미있는 건 당구장 언어가 단순한 은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안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화 이동 경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 산업화 시절, 일본식 스포츠 문화가 유입되던 흔적이다. 동네 당구장에서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전해진 생활 언어이다. 그리고 지금도 남아 있는 아날로그 감성인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뱅크샷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아마 앞으로는 가라쿠라는 말이 점점 사라질지도 모른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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