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의 사람 ‘人’] '배구에 살고 배구에 죽는다' 전북 최고 명문 남성고 김은철 교장

전국 체전 5연패한 고교배구 지도자의 전설

김학수 기자| 승인 2024-03-29 12:02
지난 해 3월 열린 남성고 김은철 교장 취임식 모습. 제자 신진식 감독이 단상 오른쪽에 앉아 있다.
지난 해 3월 열린 남성고 김은철 교장 취임식 모습. 제자 신진식 감독이 단상 오른쪽에 앉아 있다.
지난 해 3월 1일 전북 익산 남성고 체육관 강당에서 제18대 김은철 교장 취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지역 많은 교육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단상 귀빈석에는 1990년대와 2000년대 ‘갈색 폭격기’로 이름을 날렸던 신진식감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선수 시절 김세진과 함께 '좌진식 우세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삼성화재의 겨울리그 9연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가 취임식에 참석한 것은 스승인 김은철 교장을 축하하기위한 때문이었다. 신진식은 남성중, 남성고를 거쳐 성균관대로 진학해 ‘배구 레전드’로 성장했다. 모교에 대한 애교심이 남다른 그는 특히 배구 감독이었던 김 교장의 남다른 지도에 존경과 신뢰를 갖고 있었다.

신진식은 선수 시절 “김 감독님은 선수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하며 개인 기량 보다 팀웍 조성에 많은 힘을 기울이셨다”며 “고교 시절부터 내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김 감독님의 인성을 토대한 한 인간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신진식은 국내 최고의 수비 전문 이호와 함께 좌우 쌍포로 맹활약하며 남성고를 고교 최강 팀으로 이끌었다. 고교 졸업 무렵 성균관대, 한양대, 명지대의 스카우트 3파전에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성균관대행을 결정했다. 학교측과 김 감독과 유대 관계가 깊엇던 한양대와 명지대 보다 성균관대로 가기로 한 것은 당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김 감독이 선수 장래를 선수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게 함으로써 가능했었다는게 당시의 분석이기도 했다. 김 감독은 177cm의 단신으로 고교시절 한 시대를 풍미한 명공격수였다. 폭발적인 점프력으로 상대 코트에 꽂아 넣는 강 스파이크는 제자인 신진식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집무실에서의 남성고 김은철 교장
집무실에서의 남성고 김은철 교장


한국 중고배구 지도자의 전설
, 김은철 감독

한국중고배구팀 감독은 대개 체육교사이거나 전임 지도자가 맡는다. 김은철 감독은 체육교사를 겸했다. 학교에서 일반 학생들의 체육 수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배구팀을 지도했다. 교사와 배구 감독이라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다보니 그는 다른 교사들보다 곱절 이상 일을 하는 셈이었다.
남성중고 배구 선수 출신인 김 감독은 고교 졸업 후 전북대학교 사범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배구공을 놓지 않았다. 1989년 남성여중을 거쳐 다음해 모교인 남성고 체육교사로 발령받았으며 배구 명가 남성고의 신화를 써내려가며 전국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1988년 춘계 전국남녀 중고배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무려 52회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89년, 90년, 91년, 92, 93년 내리 전국체육대회 금메달을 따내며 대회 사상 첫 5연패란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의 지도 철학은 튼튼한 ‘기본기’를 쌓는 것이다. 튼튼한 기본기 위에 수비조직력이 생기고, 콤비네이션(속공) 플레이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교과서적이지만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은 ‘김은철 배구’는 바로 기본기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는 선수들의 생활지도에 남다른 신경을 기울였다. 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휴대폰을 없앴다. 밤새 게임을 즐기다보면 다음날 컨디션 난조로 게임을 망치기 일쑤여서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고교 시절 청소년 국가대표 레프트 주공격수로 태극마크를 달은 그는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이었다. 지도자로 변신한 후 1996년 청소년국가대표 코치에 이어 2001년 남자 유스대표팀 감독으로 세계 코트를 호령했다. 대표팀 사령탑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1년과 2011년 두 차례나 더 역임했다. 대한배구협회장 지도자상, 대한체육회장 표창장, 체육청소년부장관 표창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김은철 남성고 교장(오른쪽)이 대만 풍원상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은철 남성고 교장(오른쪽)이 대만 풍원상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고 배구 감독에서 전북 최고 사립 명문교 교장으로

체육교사 출신이 남성고 교장으로 임명된 것은 1946년 남성고 설립이후 77년 만에 처음이다. 그가 남성고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은 배구를 통해 학교 위상을 드높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1946년 익산에서 개교한 남성고는 전주고와 함께 전북의 명문교로 이름을 날렸다. 국회의원과 장·차관, 교수, 판·검사, 의사 등 수많은 사회 주요 인사를 배출해 왔다.
그는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며 모든 공을 후원자들에게 돌렸다. 손태희 이사장과 교직원들에게 가장 먼저 고마움을 표시했다. 특히 박영달 전임 교장은 자율형 사립고 지정 이후 가뜩이나 학교 경영이 힘든데도 흔쾌히 배구 특기자 장학금 혜택을 부여해준데 대해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마음 놓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남성고 배구부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소삼 익산시배구협회장과 이쌍동 세계로건설 대표, 김강용 다고내푸드 대표 등 배구인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김 교장은 “학생 위주의 교육 외에 평균 40대 초반으로 구성된 교사들의 사기진작과 실력 증진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4년 전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환한 학교를 “실력과 비전, 올바른 인성을 지닌 남성인 육성이라는 기치 아래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교장은 올해 초 대만의 배구 명문 풍원상고와 자매결연을 맺어 양교가 본격적인 교류를 하도록 했다. 대만 풍원상고는 그가 감독 시절부터 10년이상 배구부를 이끌고 해마다 서로 방문하는 형식으로 교류를 이어왔는데 이번에 자매결연을 맺고 공식 교류를 갖게 된 것이다. 풍원상고는 최근 7차례 대만의 전국단위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이어갔으며 그동안 11차례 우승을 거두는 등 대만 남자고교 배구의 최강자로 우뚝 선 명문 고등학교다.

김 교장은 양교가 자매결연을 통해 배구뿐만아니라 학생과 교직원들끼리의 문화적 교류를 비롯해 교과활동의 공유 등을 통해 두 학교뿐만 아니라 대만과 대한민국의 우호 증진에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남 배구인 출신 ‘교장 선생님’ 계보를 잇는다

그동안 호남 지역에선 배구인 출신 교장 선생님이 여러명 배출됐다. 국내에서 스포츠 종목 중 학교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종목이 배구이며, 특히 호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교장 선생님이 탄생했다. 명문 목포고 교장을 역임한 고 박평환씨는 배구 국제심판 출신이다. 조선대 시절 배구를 뒤늦게 시작한 박평환 교장은 국내외 배구대회에서 20여년 활동하다 2006년 추계대학배구연맹전에서 심판 정년 나이인 55세 규정에 따라 심판 은퇴를 하게됐다.
한국배구연맹(KOVO) 심판위원장을 역임한 서태원씨도 교장선생님 출신이다. 서 전 심판위원장은 순천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구선수로 활동 대학졸업 후 목포대학교와 첫 인연을 맺은 계기로 그동안 목포고, 목포여고, 목포상고, 하의종고 등 전남 지역에서 38년간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금산 제일 초등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호남 지역에서 배구인 출신 교장 선생님이 많이 나온 이유는 체육 교사를 하면서 감독이나 심판 업무를 겸하며 학생들의 운동 환경 개선에 노력하고, 면학 분위기 조성에도 힘을 쓰고 학생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라는 게 교육계의 평가이다. 특히 호남 지역에선 심판 생활을 하며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는 성공 방식을 따랐다.
1990년대 예전 취재 기자 시절 호남 출신 심판이 유독 많았던 생각이 난다. 학교 선생님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바쁜 학교 생활 속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배구 대회에 심판을 보기 위해 주중, 주말 짬을 내 열심히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학교 교장 선생님이 된 호남 배구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학교 최고 책임자인 교장 선생님으로 오르기까지 적지않은 어려움을 이겨낸 이들은 교육자로서 명예와 사명감을 깊게 품고 있었다.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 드문 요즘 교육계에서 배구인 출신 호남지역 교장 선생님은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하다고 본다.

남성고 교정에 선 김은철 교장.
남성고 교정에 선 김은철 교장.


배구에 죽고 배구에 산다’

그는 청춘을 배구 감독으로 바쳤다. 배구에 죽고 배구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평생을 오직 남성고 배구의 성공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골프‧등산 등 그 흔한 취미생활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일요일 익산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승부의 세계에서 지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유일한 낙이다. 신앙생활을 통해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얻었다.

그는 배구계의 선배들이 베풀어준 많은 사랑과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한국배구연맹 조영호 총재 특보, 고인이 된 대학배구연맹 전 송만덕 부회장 등에게 고마움을 늘 갖고 있다고 했다. 배구계 인사의 경조사에는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열심히 찾아다니며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 ‘의리파’이기도 하다.

평생 냉정한 코트의 승부사로 살아오다 근엄한 ‘교장 선생님’이 됐지만 가정에 들어가면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변신한다. 보건진료소 소장을 역임한 박미영씨와 평생 반려자로 생활하며 1남 2녀를 두고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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