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뇌는 밤에도 일한다
신경과학에는 '기억 공고화'라는 개념이 있다. 선수가 연습장에서 스윙을 반복할 때 뇌의 내비게이션 칩이라 할 수 있는 해마는 그 동작 패턴을 임시 파일로 저장한다. 이것이 장기 기억으로 굳혀지는 시간이 바로 수면 중이다. 특히 REM(램) 수면 단계, 즉 뇌가 깨어 있을 때와 거의 비슷하게 활성화되면서 꿈을 꾸는 그 시간에 해마는 낮의 운동 패턴을 대뇌 피질로 옮기고 압축한다. 뇌의 야간 파일 이전이다.
비시즌 내내 반복한 스윙, 쌓아온 타격 루틴, 작은 성공의 감각들이 밤마다 조금씩 이 지하 창고로 내려간다. 그리고 시즌이 열렸을 때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린다. 중고참 백업 타자들이 기회가 왔을 때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려한 겨울을 보내서가 아니다. 조용한 밤을 충분히 보냈기 때문이다.
△ 의식이 무의식을 잡아먹을 때
반대 장면도 야구장에서는 매 시즌 반복된다. 검증된 주전 타자가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다. 전 시즌 홈런왕, 타격왕 출신의 타자가 시즌 초반 20타석 연속 무안타에 빠지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실력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다. 뇌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타격이 안 되는 순간, 의식이 개입한다. "왜 밀렸지? 팔꿈치가 올라갔나? 체중 이동이 늦었나?" 판단의 사령탑인 전전두엽이 무의식의 창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이 문제다. 창고 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안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오던 동작이 흐트러진다.
이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스윙이 아니다. 오래 쌓아온 것들이 다시 흘러나올 수 있는 고요함이다.

비슷한 장면은 주말 골프장에서도 매주 반복된다. 주중에 시간을 내어 연습장을 찾고, 레슨도 받고, 유튜브로 스윙 분석 영상도 챙겨 보는 성실한 골퍼가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다. 연습 당일에는 분명히 잘 맞던 스윙이 이틀 뒤 실제 라운드에서는 안 나온다. 반면 한동안 연습을 못 하다가 나간 라운드에서 의외로 리듬이 살아 있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연습 직후 라운드를 나간 날을 들여다보면 패턴이 있다. 전날까지 연습량이 많았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경우다. 수면이 부족하면 전전두엽이 과부하 상태가 되고, 새로 입력된 동작 패턴이 아직 지하 창고로 내려가지 못한 채 그라운드에서 의식과 충돌한다. "레슨에서 배운 것 써야지"라는 생각이 몸에 이미 익은 루틴을 방해한다.
반면 연습 후 충분히 자고 나간 날은 레슨 내용이 무의식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움직이는 날, 그날이 기억에 남는 라운드가 된다.
연습은 낮에 하지만 실력은 밤에 완성된다. 수면은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전날 흘린 땀을 기술로 바꾸는 마지막 훈련 세션이다.
△ 명경지수(明鏡止水)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편에서 비롯된 말이다. 흐르는 물은 거울이 되지 못한다. 고인 물만이 사물을 완전히 반영한다. 의식의 파문이 가라앉을 때 비로소 무의식의 실력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중고참 백업 타자의 '늘 하던 대로'는 기술이 아니라 고요함이었다. 비시즌의 반복이 수면을 통해 압축되고 고요한 상태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슬럼프에 빠진 주전 타자가 되찾아야 할 것도 새로운 폼이 아니다. 오래 쌓아온 것들이 다시 흘러나올 수 있는 명경지수의 상태다.
오늘 밤 당신이 눕는 그 순간에도, 낮에 흘린 땀은 조용히 압축되고 있다. 실력은 그라운드에서 시작되지만 잠든 사이 완성된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반복했는가. 그리고 오늘 밤 얼마나 깊이 잘 것인가.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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