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기업은행배 여자바둑 마스터스 예선[한국기원 제공]](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7311053450655305e8e94108722223323240.jpg&nmt=19)
기업은행배 여자바둑 월드마스터스는 여자 바둑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다. 기존에는 국내 기사 16명이 우승 상금 5000만원을 놓고 겨뤘다. 국제 대회가 되면서 32명의 기사가 우승 상금 2억원을 놓고 겨룬다. 중국 오청원배는 28명이 출전해 우승자에게 50만위안(약 1억600만원), 일본 센코컵은 8명이 참가해 우승 상금 1000만엔(약 8800만원)을 준다.
바둑 뉴스를 보다 보면 "국내 최대 기전", "세계 기전 우승", "신설 기전"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한다. 바둑은 상대를 죽이는 스포츠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전쟁을 치르는듯한 섬뜩한 제목을 대회 이름이 붙이는 경우가 있다.
'기전(棋戰)'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단어는 한자어로 바둑 '기(棋)'에 싸움 '전(戰)'을 쓴다. 말 그대로 ‘바둑으로 벌이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戰)'은 무력을 뜻하는 전쟁이 아니라 승부를 겨루는 대결을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결승전’, ‘예선전’, ‘명인전’, ‘왕위전’처럼 '전(戰)'은 오래전부터 경쟁과 대결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여 왔다. (본 코너 1802회 ‘왜 바둑에서는 '명인(名人)'이라 말할까’ 참조)
바둑이 '기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도 있다. 사실 이 말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용어가 아니다.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근대 신문바둑 시대가 만들어 낸 용어에 가깝다. 신문사가 바둑대회를 개최하면서 승부를 하나의 '전(戰)'으로 표현했고, 그 결과 공식 대회를 통칭하는 '기전'이라는 말이 정착했다.근대 바둑이 신문사와 함께 성장하면서 공식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신문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국을 하나의 큰 승부로 묘사했다. '명인전', '본인방전', '국수전'과 같은 명칭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으면서, 이러한 공식 대회를 통칭하는 말이 바로 기전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우승 상금과 규정, 주최 기관을 갖춘 공식 바둑대회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정착했다. (본 코너 1818회 ‘바둑에서 왜 ‘곤인방’이라 말할까‘ 참조)
우리나라 언론은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때 기전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21년 8월27일자 ‘棋戰(기전)에流血(유혈)하고 고소까지뎨줄해’ 기사에 기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당시 신문 제목은 가능한 한 짧고 압축적인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생소한 조어를 갑자기 제목으로 쓰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 용례는 기전이 개화기 이후, 늦어도 1920년대 초에는 언론에서 통용되던 어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바둑이 추구하는 정신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바둑은 상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게임이 아니라 집의 크기를 겨루는 게임이다. 승패는 나뉘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예법과 품격을 중시한다. 대국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는 함께 복기하며 서로의 수를 돌아본다.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수를 배우는 과정이 바둑 문화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전(戰)'이라는 글자가 살아남은 이유는 바둑 한 판이 지닌 치열함 때문이다. 수십 수 앞을 내다보는 계산, 상대의 의도를 읽는 심리전, 한 수의 실수가 승부를 뒤집는 긴장감은 전쟁에 비유될 만큼 치밀하다. 그래서 기전은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품게 되었다. 최고의 기사들이 자신의 명예와 실력을 걸고 벌이는 지적 승부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요즘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바둑의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기전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이는 바둑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경쟁의 문화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전쟁을 뜻하는 글자를 쓰지만, 그 속에는 폭력이 아니라 지혜와 인내,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그래서 기전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아름답다. 싸움을 뜻하는 글자를 품고 있지만, 실제로 겨루는 것은 힘이 아니라 생각이다. 결국 바둑의 기전은 돌을 앞세운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가 맞서는 가장 평화로운 승부라고 할 수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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