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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69] 바둑에서 왜 '정선(定先)'이라 말할까

2026-08-09 07:07:27

[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69] 바둑에서 왜 '정선(定先)'이라 말할까
바둑 용어 ‘정선(定先)’은 참 묘한 말이다. 한자어로 ‘정할 정(定)’과 ‘먼저 선(先)’을 써서 말 그대로 풀면 ‘먼저 두는 것을 정한다’는 뜻이다. 흑이 먼저 두되 백에게 덤을 주지 않는 방식이다. 요즘 프로기사들의 대국은 대부분 ‘호선(互先)’으로 치러지고, 백에게 6집 반 또는 7집 반의 덤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코너 1868회 ‘바둑에서 왜 ‘호선(互先)’이라 말할까‘ 참조) 반면 정선에서는 흑이 먼저 두는 대신 덤이 없다. 한국기원 역시 기력 차이를 표시하는 기준에서 정선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과거 일본 바둑의 치수제에서는 실력 차이에 따라 정선(定先), 선상선(先相先), 선이선(先二先) 등 여러 단계가 있었고, 이때 ‘선’은 덤 없이 흑을 잡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정선의 핵심은 “먼저 두는 사람을 정한다”에 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바둑 용어로 정선이라는 말은 1970녀대 이후 등장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경향신문 1971년 12월23일자 ‘바둑’ 기사에 ‘공식대국 3국과 친선대국6국에서대결한 이번 韓日(한일)친선 교류대국에서 韓國(한국)은 金在九(김재구)6단이 定先(정선)으로「오꾸보」9단을 이긴것이유일한 승국으로 총전적9전1승8패로 완패당해’라고 전했다. 이 자료는 ‘정선’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 언론에 언제부터 실제로 정착해 사용됐는가를 보여주는 꽤 중요한 사례이다. 당시 기사에서 이미 ‘定先(정선)’을 한자로 병기하면서 독자에게 우리말 독음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선 자체는 일본식 치수제에서 오래 사용된 용어였다.
바둑에서 먼저 두는 사람이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첫 수를 놓는다는 것은 선택권을 갖는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책임을 먼저 떠안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디에 첫발을 내디딜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판을 이끌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부담이다.

그래서 정선은 묘한 균형을 이룬다. 한쪽은 먼저 돌을 놓는다. 다른 한쪽은 그 수를 보고 대응한다. 대신 먼저 두는 쪽에게 주어지는 추가적인 이득은 없다. 바둑판 위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나름의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셈이다. 바둑에서는 실력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 대국할 때 접바둑을 두기도 한다. 몇 점의 돌을 미리 깔아놓음으로써 기력의 차이를 보정하는 방식이다. (본 코너 1844회 ‘왜 '접바둑'이라 말할까’ 참조)

정선 역시 오랜 바둑 문화 속에서 상대적인 기력 차이를 반영하는 대국 방식으로 활용돼 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몇 점을 받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균형을 만들어 주느냐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무조건 봐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약한 사람에게 아무런 배려 없이 똑같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둑은 오래전부터 실력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승부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방식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정선의 진짜 매력은 승부의 조건에만 있지 않다. 바둑을 오래 둔 사람이라면 안다. 돌 하나를 놓는 순간부터 그 돌은 자신의 책임이 된다. ‘왜 거기에 놓았느냐’고 물었을 때 “상대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 한 수 한 수가 선택이고, 그 선택들이 모여 한 판의 결과를 만든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먼저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는 늘 책임이 따라온다. 직장에서 먼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그렇고, 가족 사이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는 사람도 그렇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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