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스토리] 스포츠 스타들의 골프 이야기 15 ‘붕대투혼’의 서울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한명우의 ‘또박이 골프론’](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071208511109109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한명우는 동양인 최초의 중량급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유형 레슬링 82kg급은 서울올림픽 전까지 동양인이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체급. 때문에 서른 세살 늦은 나이의 한명우에게 그 어느 누구도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일본선수와의 예선전에서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남은 경기를 치루고도 금메달을 획득, ‘붕대 투혼의 전사’로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심었다.
한명우씨가 본격적으로 골프에 뛰어 든 것은 말레이시아 레슬링 국가대표 감독 일을 하게 된 1990년대 후반. 은퇴 후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골프채를 잡았으나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근력이 뛰어나 마음먹고 후려치면 3백야드를 넘겼지만 옆으로 새는 게 더 많은데다 그린을 앞에 두고 ‘온탕 냉탕’해야 하는 게 싫었다. 재미없이 가끔 나가다 보니 드라이버 샷을 2백70야드 이상 보내고도 100타 언저리에서 놀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시절, 시간은 많은데 특별히 할 것이 없어 라운드를 생활화 하다 보니 흥미와 의욕이 생겼고 ‘이왕 하는 것 잘해보자’고 덤벼들면서 실력이 급성장했다.
말레이시아는 레슬링을 거의 하지 않던 나라. 한명우 감독은 선수발굴부터 훈련까지 혼자서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엔 많이 바빴지만 레슬링 하려는 선수가 없었던 처음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골프가 유일한 낙이었다.
아이언은 7번을 주로 연습했다. 7번이 확실해지면 앞뒤 아이언은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이브보다 아이언 연습을 더 많이 했다. 그렇게 6개월여, 첫 싱글을 작성했지만 한동안 90대 초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1년 이상 매달리니 80대 초반으로 훅 내려갔고 2~3년이 지난 후에는 꾸준히 싱글을 기록했다. 라이프 스코어는 4언더 68타이고 지금도 심심찮게 이븐파를 친다.
비록 저녁내기 용 친선이지만 레슬링 대 유도의 8-8 경기 날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싱글 스코어를 적어낸다. 그런 날은 철저하게 전략적인 골프를 한다. 드라이브 공을 230에서 240야드쯤 얌전하게 보내는 게 첫 번째 일. 이젠 300야드를 날리지도 못하지만 절대 드라이브 거리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경험상 드라이브 거리가 많이 나가는 날 보다 정확한 날의 스코어가 더 좋았다’는 한명우씨는 ‘드라이브 거리가 200m 정도면 정확한 코스 매니지먼트가 더 중요하다’고 나름의 골프이론을 말했다.
“레슬링은 신참들과 스파링을 할 수 없고 나이 먹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지만 골프는 그 누구와도 편하게 어울릴 수 있고 나이 들어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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