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일본 교육자 가노 지고로에 의해 창시된 ‘강도관 유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9년 황성기독교 청년회에서였다. 황성기독교 청년회은 유도반을 만들어 보급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우리나라 언론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유도 종목을 지상에 소개했다. 조선일보 1921년 1월27일자 ‘중앙청년회운동부실내운동(中央靑年會運動部室內運動)’ 기사는 다음과 같다.
‘경성종로(京城鍾路)에 잇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운동부(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運動部)에셔는 내이월삼일오후칠시(來二月三日午後七時)부터 실내운동장(室內運動塲)(써커스)대회(大會)를 당회관실내운동실(當會舘室內運動室)에셔 개(開)□할터인대 관람권(觀覽券)은 당일 회장(當日會塲)의 훤잡(喧雜)을 피(避)키위(爲)하야 미리 발매(發賣)하며 상층(上層)에는 부인(婦人)의관람(觀覽)을 사절(謝絕)한다하며 당일 운동경기(當日運動競技)의 종목(種目)은 여좌(如左)하다더라
일(一),유도(柔道),검도(劒道)
일(一),스위ㅇ,목마(木馬),철봉(鐵捧),인도봉(印度棒) 기계운동업(機械運動業)
일(一),여흥(餘興),희극(喜劇),연합무도(聯合舞蹈)
기타체육적경기수종(其他體育的競技數種)’ 조선중앙기독청년회에서 유도를 비롯한 여러 종목의 시범 경기를 관중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기독교청년회 유도부는 1928년 유도용어를 우리말로 제정하여 사용했다. 이후 평소 훈련은 물론 기독청년회가 주최하는 단체유도대회에서 우리말로 전경기가 진행됐다. 1929년 9월 동경유학생 무도회 주최로 전국 조선중학교 유도대회가 열렸고, 같은 해 10월에는 기독교 청년회 주최로 전 조선단체 유도대회를 개최했다. 1931년 조선 연무관을 개설하였고 1932년 조선유도연합회가 조직되어서 유도 보급을 촉진했다. 1938년 일본의 한국에 대한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 도장을 모두 폐쇄시켰으며, 모든 도장은 강도관 한국지부로 강제통합됐다.
하지만 대한유도회는 1970년대부터 한국유도의 세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심판원들은 국내 경기에서 국제용어인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동아일보 1975년 5월3일자 ‘柔道(유도) 심판用語(용어) 日本語(일본어) 쓰기로’ 기사는 이제까지 우리말로 심판용어를 사용해온 유도 경기를 국제유도연맹 경기 심판규정의 용어가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국제경기에 나가 당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본어를 사용키로 했다고 전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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