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손기정(오른쪽)옹이 생전 1984년 LA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필자를 맞아주고 있다. 사진= [김원식 제공]](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930073721040675e8e9410871751248331.jpg&nmt=19)
작은 고무신으로 시작한 뜀박질
신발이 닳아 못 신게 되자 어머니는 여성용 작은 고무신을 내주었다. 손기정은 고무신이 달리기를 막으려는 의도임을 알았지만, 끈으로 발을 묶고 집과 학교 사이를 달렸다. 학교에서는 맨발로 훈련을 이어갔다.
맨발로 흙바닥을 힘차게 딛으며 달리는 아들의 모습은, 뜀박질을 전혀 다르게 보이게 했다. 고무신 한 켤레와 맨발로 뛰는 아들의 집념에 마음이 움직인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운동화 한 켤레를 내밀었다.
가족의 인정은 손기정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가장 큰 후원이었다. 이후 어머니는 선수 아들을 정성껏 뒷바라지했고, 손기정의 꿈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아이의 고집’에서 ‘민족을 대표할 주자의 사명’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베를린을 향한 전환점
1931년 손기정의 5,000m 기록은 19분대였다. 세계 기록이 14분대임을 감안하면 아직 격차가 컸다. 그의 목표는 당시 장거리의 제왕이라 불린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였다. 좋은 환경에서 훈련하는 누르미를 떠올리며 맨발의 손기정은 더 치열하게 달렸다.
선배들이 남긴 사명감
당시 육상부 주장 조인상은 손기정에게 편지를 보냈다.
“암담한 조국의 미래는 젊은이들이 개척해야 하며, 육상은 설움 받는 이 땅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길이다.”
그 사명감 어린 권유는 손기정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
입학한 지 보름 만에 그는 일본 원정 경기에 나섰다. 도쿄–요코하마 역전경주에서 첫 주자로 달려 1위로 골인했고, 양정팀은 일본 20개 학교를 제치고 당당히 우승했다. 서울역에 모인 600여 명의 학생들이 꽃다발을 걸어주며 환영했을 때, 손기정은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확신했다.
1932년, 양정학교 육상부는 또 하나의 중대 순간을 맞았다. 선배 김은배와 권태하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것이다. 대회를 앞두고 권태하는 손기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손 군이라면 틀림없이 세계 마라톤을 제패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꼭 세계를 제패해서 저 일본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 주게.”
권태하의 말은 손기정의 가슴에 불씨처럼 남았다. 고무신으로 시작한 그의 질주는 이제 세계를 향한 도전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4년 뒤 베를린, 그는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결실을 움켜쥐었다.
![[특별 기고] 마라토너 손기정 이야기②](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930073800088875e8e9410871751248331.jpg&nmt=19)
[김원식 마라톤 해설가·전남 장성중 교사]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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