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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588] 북한에선 왜 ‘팬(fan)’을 ‘응원자,관람자’라고 말할까

2025-10-28 06:54:44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국제축구 경기 시작 직전 모습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국제축구 경기 시작 직전 모습
1991년 5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코리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평양 친선경기가 열렸던 평양 능라도의 5.1 경기장은 15만 관중이 꽉 들어찼던 것은 당시 취재차 갔던 필자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관중석에 직접 올라가보니, 구역별로 평양 시내 각 동별 표시가 돼 있었다. 관중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표시하는 구역에 질서정연하게 앉으면 됐다. 한국처럼 자신이 구매한 표를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티켓에 적힌 지정석을 찾아가며 번거로움은 그만큼 피할 수 았을 것으로 보였다.

북한에선 관중들은 ‘팬’이라 하지 않고 ‘응원자, 관람자’라 부른다. ‘팬’이라는 외래서 대신 우리식 의미어로 바꿔 쓰는 것이다. 영어 ‘fan’은 라틴어 ‘fanatic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연회, 잔치 등을 의미하는 ‘feast’와 연관된 말로 신전이나 성스러운 장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fanatic’은 1640년 영어에서 종교적으로 열정적인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형용사적 의미로 열중하는 의미로도 쓰였다. ‘fan’이라는 단어는 1884년 미국 야구 행사 기획자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처음 사용했다. (본 코너 236회 ‘‘야구팬’의 ‘팬(Fan)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참조)

북한에선 특정 스타를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의미를 갖는 ‘팬’은 자본주의 연예·스포츠 산업의 산물로 인식한다. ‘팬’을 ‘응원자, 관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외래어를 없애려는 언어 정책 때문만이 아니라, 사상적·문화적 배경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조선어 정화운동’을 추진했다. 이때 일본식 표현과 영어 등 서구 외래어 등을 ‘사상적으로 불순한 언어’로 규정했다. 특히 서양 대중문화에서 온 낱말은 모두 ‘부르주아 문화의 잔재’로 간주했다. 김일성의 언어정책 원칙은 ‘우리말을 지키는 것은 사상과 문화를 지키는 일이다’이라고 표방했다. 따라서 ‘팬’은 적극적으로 선수나 단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응원자’나, 단순히 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관람자’로 바꿔 부르게 한 것이다. 이는 ‘팬’의 의미를 기능 중심으로 나눈 표현이다. (본 코너 1581회 '북한은 문화어에서 스포츠 용어를 어떻게 바꾸었나' 참조)

북한 체육 기관지 ‘조선체육’은 “체육장은 응원자들의 혁명적 열기로 끓어번진다”라고 기술했다. 북한 체육교양서는 “체육을 구경만 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응원과 참여로 집단적 기상을 높여야 한다”고 규정해 ‘팬’이라는 외래어는 단순히 언어 문제가 아니라 “인민의 태도와 사상 문제”로 연결시킨다.

북한의 응원 문화는 국가지도자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선수단을 응원하는 것도 국가적 영예를 위한 행위로 간주하고 ‘응원단’은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라 정치 선전단의 성격을 갖는다. 조선중앙TV는 2018년 FIFA 월드컵에서 북한팀의 중계방송을 하며 “김정은 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공화국대표팀을 응원하자”고 밝혔다. 북한에서 ‘팬’이라는 개인적 열정의 개념은 불필요하거나 불순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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