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래블링은 동사 트래블(Travel)에 진행형 ‘ing’가 합성된 말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원래 트래블은 일을 의미하는 프랑스 고어 ‘Travail’이 변형돼 만들어졌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는 보통 사람들이 멀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재와 같은 여행의 의미로 트래블이 쓰이게 된 것은 14세기 이후였다. 트래블은 영어로 정착되면서 여행을 한다거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본 코너 424회 ‘여행을 의미하는 트래블링(Traveling)이 어떻게 반칙용어로 쓰이게 된 것일까’ 참조)
예전에 국내 농구에선 트래블링 대신 ‘워킹(walking)’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일본을 통해 국내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워킹이라는 말은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1990년대 후반 국내에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외국인 선수들이 코트에 등장하며 워킹 대신 트래블링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쓰게됐다.
북한 농구에선 ‘트래블링’ 대신 ‘걸음반칙’이라고 말한다. 공을 잡은 채 허용된 걸음 수를 넘겨 이동하면 곧바로 ‘걸음반칙’이 선언된다. 반칙을 명시해 규칙 위반임을 나타낸다. 이 말은 동작의 핵심을 그대로 풀어 쓴 표현이다. 공을 가진 채 이동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규칙을 어겼다는 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트래블링이 다소 추상적 기술 용어라면, 걸음반칙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규칙 언어다.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걸음을 많이 걸었다”는 말만으로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이 명명법에는 북한 체육 언어의 일관된 원칙이 담겨 있다.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오기보다 의미를 해체해 우리말로 재구성하고, 기술보다 행위를, 감각보다 규범을 앞세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표현이 단순한 번역을 넘어 농구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남쪽에서 트래블링은 순간의 실수, 혹은 기술 미숙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북한의 걸음반칙은 규정 질서를 어긴 행위로 명확히 규정된다. 경기의 흐름보다 규칙의 준수가 먼저인 셈이다. (본 코너 1600회 ‘사회주의 관점으로 본 북한 스포츠 언어’ 참조)
리바운드를 ‘판공잡기’, 어시스트를 ‘득점련락’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걸음반칙은 농구를 집단적 규칙 속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언어다. 같은 농구를 보면서도, 우리는 기술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은 규칙의 이름을 말한다. 공 하나를 들고 몇 걸음 더 내디뎠을 뿐인데, 언어는 체육관을 넘어 사회의 사고방식까지 비춘다. (본 코너 1652회 ‘북한 농구에선 왜 ‘어시스트를 ’득점련락‘이라 말할까’, 1653회 ‘북한 농구에선 왜 '리바운드'를 '판공잡기'라고 말할까’ 참조)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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