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배구에선 오늘날처럼 세터가 고정 포지션으로 분화되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격과 연결의 구분은 느슨했고, 공을 넘기기 좋은 선수가 자연스럽게 두 번째 터치를 담당했다. 그러나 1920~30년대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전술이 고도화되면서, 첫 번째 터치(리시브), 두 번째 터치(set), 세 번째 터치(스파이크)라는 분업 구조가 뚜렷해졌고, 이때부터 set라는 동작이 독립적인 기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기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포지션이 바로 세터이다. 세터는 ‘코트 위의 사령관’으로 불린다. 단순한 ‘중계자’가 아니라, 어떤 공격을 쓸지 결정하고 어느 공격수에게, 어떤 타이밍으로 공을 줄지 선택하며, 경기 흐름 자체를 ‘세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 코너 462회 ‘왜 세터(Setter)를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라고 말할까’ 참조)
우리나라 언론은 1960년대부터 세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63년 8월14일자 ‘기술(技術)은 장족(長足)의발전(發展)’ 기사는 ‘’
결승전에서 패한호남비료(호남비료(湖南肥料))「팀」은김(김성길(金聖吉))오(오찬호(吳賛鎬))박(박서광(朴瑞光))등 세선수의강타에만 의존하고 공격의폭을 넓히지못한것이 직접패인을 가져왔으나 임(임태호(林台鎬))선수의「러닝세터」로서의 활약은 특기할만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러닝세터(running setter)‘는 말 그대로 뛰어다니며 세팅하는 세터를 말한다. 1960년대 초반 한국 배구에서는 세터가 네트 근처에 거의 고정되어 있고, 토스 패턴도 단순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러닝세터는 리시브가 흔들려도 직접 이동해 공을 살리고 공·시간차·변칙 토스를 시도하며, 공격 루트를 넓히는 역할을 했다.
북한 배구에서 세터를 ‘공배치원’이라고 부른다. 공배치원은 말 그대로 공을 배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자어 ‘배치(配置)’는 사람이나 물건을 일정한 위치에 나눈다는 의미이다.l 이 말은 군사와 산업 현장에서 자주 쓰인다. 북한에선 세터를 공을 ‘연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을 ‘배치’하는 사람으로 봐 공배치원으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세터의 토스는 개인의 판단이기보다 사전에 설정된 전술 속에서 가장 알맞은 위치로 공을 보내는 행위가 된 것이다.
세터를 ‘공배치원’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공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공격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이 역할은 철저히 관리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다만 그 중요성은 스타성이나 창의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집단을 위해 정확히 기능하는가, 계획을 흔들지 않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이런 명명법은 북한 스포츠 용어 전반에서 나타난다. 개인의 기교보다는 집단의 결과를 강조한다. 스포츠를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조직적 역량을 증명하는 집단 활동으로 이해하는 시선이 언어에 스며있다. (본 코너 1600회 '사회주의 관점으로 본 북한 스포츠 언어' 참조)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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