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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673] 북한 배구에선 왜 ‘라인 폴트(line fault)’를 ‘선밟기’라고 말할까

2026-01-23 05:32:16

 2023 항조우 아시안게임 북한 여자배구 경기 모습
2023 항조우 아시안게임 북한 여자배구 경기 모습
외래어 ‘라인 폴트’는 영어 ‘line fault’를 발음대로 표기한 말이다. 서브나 공격 과정에서 발이 규정된 선을 밟거나 넘었을 때 선언되는 반칙이다. 한국, 일본 등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선 이를 영어식 표현 그대로 사용한다.

line fault는 선을 의미하는 ‘line’와 규칙 위반을 의미하는 ‘fault’의 합해진 단어이다. fault는 영국식 스포츠 규칙 언어에서 출발한 꽤 오래된 표현이다,.fault 어원은 속이다, 빗나가다라는 뜻인 라틴어 ‘fallere’이다. 이 말이 고대 프랑스어 ‘faute’(과실, 잘못)을 거쳐 중세 영어 ‘faut, faute’를 거쳐 현대 영어가 됐다. 처음 의미는 도덕적 잘못, 과실, 결함 이었다. 16~17세기부터 법·군사·경기 규칙에서 규칙을 어긴 잘못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배구, 테니스, 탁구 등에서 ‘service fault’, ‘foot fault’, ‘double fault’ 같은 표현이 공통적으로 쓰인다. (본 코너 490회 ‘배구에서 파울(Foul)과 폴트(Fault)는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참조)

line은 실, 줄을 의미하는 라틴어 ‘linea’가 어원이다. 이후 경계, 기준선, 한계를 뜻하는 말로 확장됐다. 스포츠에서의 line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규칙이 작동하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초기 배구 규칙서에서는 foot fault, line fault가 함께 쓰였는데, 둘 다 발이 선을 기준으로 규칙을 어겼을 때를 가리켰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배구, 테니스 등에서 라인폴트를 적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33년 5월23일자 ‘정구규칙(庭球規則) 난문해답(難問解答) k기자(記者) 【4】’기사는 ‘칠(七))푸레이어의 근처(近處)를 통행(通行)하는 사람의 방해(防害)로 인(因)하야 타손(打損)한 경우(境遇)에는 엇떠케되는가 답(答)·푸레이어가 주의(注意)하야만될 상용설비(常用設備)(예(例)하면코—트주위(周圍)에 나열(羅列)된 뺀취·혹(或)은 주위(周圍)의 스롭페쓰·심판(審判)·라인심판급기타부속물(審判及其他附屬物))의방해(防害)로 인(因)하야 타손(打損)한 것은 노키운트가 아니지만·푸레이어의 주의(注意)를 요(要)하는 이외(以外)의 사물(事物)의 방해(防害)로 인(因)하야 타손(打損)한경우(境遇)에는 렛즉(即)노가운트가 된는 것이다 노카운트로 다시 께임을 곤처할때에 만약전번(萬若前番)에 제일차(第一次)써비쓰가 풀트이엿스면 제이차(第二次)써비쓰만 다시하는 것이다 웨그런고하니 넷는트이전(以前)의폴트를 무효(無効)하게하지 안는 까닭이다’고 전했다. 당시 기사는 테니스 규칙 문답(Q&A)을 다루고 있는데, 1930년대 조선, 일본식 스포츠 규칙을 어떻게 번역 하게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스포츠 언어 형성사의 결정적 특징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자료인 것이다.

북한 배구에선 라인폴트를 ‘선밟기’라고 부른다. 라인 폴트가 규칙 중심의 추상적 개념이라면, ‘선밟기’는 판정 순간의 장면을 즉각 떠올리게 하는 동작 중심의 언어다. 북한 스포츠 언어의 기본 원칙은 외래어를 옮기는 데 있지 않고, 행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다.

다른 배구 용어를 살펴보면 ‘네트 터치’는 ‘그물접촉’, ‘오버네트’는 ‘손넘기’라고 말한다. (본 코너 1670회 ‘북한 배구에선 왜 ‘오버네트’를 ‘손넘기’라고 말할까‘, 1671회 ’북한 배구에선 왜 ‘네트 터치’를 ‘그물접촉’이라 말할까‘ 참조) 이러한 경향은 배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농구에서도 리바운드는 ‘판공잡기’, 파울은 ‘개별선수반칙’이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규칙의 이름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먼저 말한다는 점이다. (본 코너 1653회 ‘북한 농구에선 왜 '리바운드'를 '판공잡기'라고 말할까’, 1659회 ‘북한 농구에선 왜 ‘파울’을 ‘개별선수반칙’이라 말할까‘ 참조)

이는 북한의 교육·선전 체제와도 맞닿아 있다. 북한에서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대중 교양과 규율 학습의 수단이다. 어린이든 군인이든, 전문 지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라인 폴트가 선언됐다”는 말보다 “선밟기다”라는 표현이 훨씬 효율적인 이유다.

결국 선밟기는 북한 체육 언어가 지향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외래 규칙을 수용하되, 그것을 그대로 들여오지 않고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는 태도. 스포츠 용어 하나에도 체제의 언어관과 사고방식이 스며 있다. 발끝이 선을 스쳤을 때 울리는 호각 소리 속에는, 단순한 반칙 판정을 넘어선 언어의 정치학이 숨어 있는 셈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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