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59.일본행 프로1호 선동열, 일 마운드를 휘젓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1021806112703761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선동열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슈퍼게임에서 일본 최고타자들을 상대로 5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타자였던 오치아이는 ‘어떻게 저런 공을 던질 수 있지. 칠 수 없는 공’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5명을 상대한 20여개의 공.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격에 가까운 강한 첫 인상이었다. 일본 구단들은 경쟁적으로 스카우트전에 덤벼들었으나 결론은 주니치 드래곤즈였다.
해태는 처음 전력상실 등을 우려, 선동열의 일본행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에 밀려 결국 선동열의 일본행을 추진했다. 요미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건 등 모든 면에서 주니치 드래곤즈보다 좋았다.
해태 구단관계자와 선동열도 요미우리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불발. 그 누구도 구단주가 미리 정한 약속을 뒤집을 순 없었다. 구단관계자는 요미우리라면 구단주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했으나 역시 아니었다.
매우 아쉬운 일이었지만 선동열로선 일단 일본 프로에 뛰어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했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서선 보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역할은 해태에서의 마지막처럼 구원 투수였다. 그래서 주니치에선 그를 ‘나고야의 수호신’이라고 불렀고 그의 성을 따 ‘나고야의 태양(선-SUN)이라고도 했다. 선동열은 한자 이름을 한글 표기 그대로 읽은 첫 번째 한국인 사례였다.
일본에서의 첫 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훈련을 확실히 하고 맞이한 1997년 두 번째 시즌에서 38세이브를 기록, 세이브 공동 1위(구원 2위)를 하며 주니치의 뒷문을 확실하게 책임졌다.
방어율 0.76으로 그가 세이브에 실패한 것은 단 한번밖에 없었다. 98년엔 방어율 0.86에 3승 29세이브를 올렸고 99년엔 1승2패에 28세이브를 작성했다.
선동열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그는 1999시즌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함께 한 후 11월 22일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일본에서의 통산 성적은 162경기 10승 4패 98세이브였다.
선동열, 조성민이 테이프를 끊은 일본 프로야구 진출은 이후 러시를 이루었다. 1998년 이종범과 이상훈이 주니치에 입단했고 2001년에는 구대성이 오릭스로 향하는 등 투수군에서 정민철, 정민태, 임창용, 오승환, 이혜천 타자군에서 이승엽, 이병규, 김태균, 이범호, 이대호가 뒤를 이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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