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북한을 꺾고 출전권을 따낸 남자배구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에 앞서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역을 참배하는 모습. [대한배구협회 100년사]
1972년 뮌헨올림픽 남자배구 아시아 지역예선 남북한 경기는 지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열렸다. 아시아 국가들이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무대가 아시아가 아니라 프랑스 동부의 소도시 ‘상디에(Saint-Dié-des-Vosges)’였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선택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냉전과 분단이 스포츠 일정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당시 아시아 배구는 정치적으로 가장 복잡한 지역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존재했고, 중국·몽골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일본·이란 등 친서방 국가들이 한 예선에 묶여 있었다. 어느 한 아시아 국가에서 예선을 열 경우, 국교 문제와 입국 거부, 국기·국호 표기 문제, 심지어 국가 연주 여부까지 매 경기마다 외교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컸다. 국제배구연맹(FIVB)으로서는 경기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FIVB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아시아 예선을 아시아 밖에서 치른다’는 우회로를 택했다.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고,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 국가 모두가 비교적 부담 없이 입국할 수 있는 서유럽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상디에는 외교적 긴장이 적고, 여러 나라 대표팀을 장기간 수용할 수 있는 합숙형 시설을 갖춘 도시였다.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였다는 점도 중요했다.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공간은 정치적 마찰을 최소화하기에 오히려 적합했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 예선은 유럽 한복판에서 치러졌다. 남북한 남자배구는 지난 1963년 도쿄 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에서 첫 맞붙은 데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한국과 북한 선수들은 한반도도, 아시아도 아닌 프랑스의 작은 체육관에서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냉전의 최전선은 군사분계선만이 아니라, 배구 코트 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한국은 상디에 경기에서 북한에게 3-1로 승리를 거두고 뮌헨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72년 8월1일자 ‘목멘 애국가(愛國歌)‥‥"뮌헨서도 이겨라" 상디에 배구(排球) 승리의 날’ 기사는 ‘【상디에(프랑스)에서 신용석(愼鏞碩) 특파원】한국남자배구팀이 뮌헨올림픽아시아지역예선에서 자유중국을 3대0으로 누른데 이어 북한을 역시 3대1로 꺾어 뮌헨올림픽 본무대에 나서게된날,상디에 하늘엔 애국가와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64년도오꾜(동경(東京))올림픽뉴델리예선(63년12월)이후9년만에 두번째로 맞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한국을 성원하기위해 본고장인 프랑스를 비롯한 벨기에,서독,폴란드,룩셈부르크,스위스등 유럽여러나라로부터 교포와 유학생,해외공관직원등 4백여명이응원하러 상디에에 모였으며 이응원단은 게임전부터「서울의 찬가」「아리랑」을 불러 선수들을 격려했다.여장남자,남장여인등이번갈아등장,우리응원단의기세를 올렸고「이겨라 이겨라」함성에 섞여 기차박수가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프랑스인 주심과부심이 심판대에 올라 게임시작의 휘슬을 분것은 한국시간으로31일 새벽5시반(현지시간29일밤9시반). 박진관(박진관(朴鎭觀))감독의지시를 받은 최종옥(최종옥(崔宗玉))김건봉(김건봉(金建奉))이용관(이용관(李庸寬))이선구(이선구(李宣求))진준탁(진준탁(陳準鐸))김충한(김충한(金忠韓))의 베스트식스 스타팅멤버가 코트에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상디에에서의 승리는 한국 배구 전성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한국은 뮌헨 올림픽 본선 경기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삼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최강 일본을 꺾으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상디에 경기에서 대 북한전 승리의 주역들인 대표선수들은 ‘상디에회’ 모임을 결성해 우의와 친목을 다졌다. 회원 명단에는 최종옥, 김건봉, 진준택, 정동기, 김귀환, 김충한, 이용관, 이선구, 이춘표, 이인, 박기원, 강만수 등이 포함됐는데, 한국 남자배구의 역사와 우정을 기념하는 대표적 모임으로, 현재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