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북한 축구 대표팀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1226094338018005e8e9410871751248331.jpg&nmt=19)
북한에서는 김 위원장의 말에서 보듯 ‘사변(事變)’이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북한에서 사변은 사전적으로 국가·사회·군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뜻한다. 이 점에서 남한이나 일본의 한자어 사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한에서도 한때 ‘6·25’ 전쟁 대신 ‘6·25 사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적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이 말을 남한에서 쓰지 않는다. ‘6·25 사변’은 한국전쟁을 전쟁이 아닌 ‘불가피하게 벌어진 사건’으로 명명함으로써, 전쟁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조국해방전쟁 서사의 출발점으로 만들기 위한 북한의 정치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변이라는 한자어는 한중일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왔던 말이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검색에 따르면 사변이라는 단어는 국역 2,159회, 원문 3,212회 등 총 5,371회나 나온다. 예전부터 우리 미족이 즐겨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쓰는 사변은 남한의 일반적 용례와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 범위·정치적 뉘앙스·선전적 기능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단어 하나로도 북한의 역사 인식과 언어 전략이 드러난다.
북한에서 스포츠 분야에 사변이라는 표현이 쓰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다. 단순 경기 사건이 아니라 체제·외교·이념과 직접 연결되는 비정상적 국면일 때만 가능하다. 단순 스포츠 사고에는 사변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게 원칙이다. 먼저 분명한 선부터 긋자면, 북한에서는 오심(誤審), 난투, 선수 부상, 경기 파행, 판정 논란 같은 일반 스포츠 사건에는 절대 사변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 경우는 사고(事故), 사태(事態), 소동(騷動) 문제로 처리된다.
북한 스포츠 보도에서 사변이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 중 최소 두 가지가 충족돼야 한다. 국가 주권·체제 존엄에 대한 도전, 적대 세력의 의도적 개입, 정치·외교 문제 등으로 비화 하는 경우이다. 스포츠에서 사변으로 표현될 수 있는 대표적 유형으로는 국제대회에서의 ‘정치적 충돌’, 북한 선수단에 대한 국기·국가 모독, 북한 체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구호·행동, 의도적 편파 판정이 “적대 행위”로 규정될 때 등이다. 북한 매체에서 ‘스포츠 사변’은 “적대세력들이 스포츠를 정치화하며 우리 공화국의 존엄을 해치려 한 엄중한 사변이 발생하였다”, “적대세력들이 국제경기 마당에서 빚어낸 엄중한 사변”라는 등으로 표현한다.
2013년 국제축구대회에서 북한 국기 대신 한국 국기가 전광판에 등장했을 때, 북한 매체가 이 사안을 단순 실수로 보지 않았다. 그 순간은 경기 지연이 아니라 ‘존엄 침해’였고, 따라서 사변의 자격을 얻었다. 국제 스포츠기구의 제재나 참가 제한 역시 마찬가지다. 규정 위반이나 행정 문제로 처리될 수 있는 사안이 북한 보도에서는 ‘적대세력이 국제체육기구를 도구로 벌여놓은 사변’으로 재구성된다. 스포츠 규칙은 사라지고, 대신 외교 압력과 체제 대결의 서사가 전면에 등장한다. 사변은 사실의 명칭이 아니라, 책임을 외부로 귀속시키는 언어 장치다.
냉전적 대립 구도가 분명한 경기에서 벌어진 충돌도 사변으로 격상될 수 있다. 관중의 정치 구호, 선수단에 대한 조직적 방해, 경기 중단이 외교 항의로 번질 경우, 북한은 이를 ‘체육 마당에서 벌어진 정치적 도발’로 규정한다. 이때 스포츠는 평화적 교류의 공간이 아니라, ‘전쟁 없는 전선’이 된다.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국제대회가 제재나 외교 압력으로 무산될 때도 마찬가지다. 대회 취소는 운영 실패가 아니라, 체육 발전을 가로막으려는 외부의 책동이 된다. 사변이라는 단어는 이 모든 맥락을 한 번에 포괄하는 정치적 결론이다.
결국 북한 스포츠에서 사변이란, 국가가 위협을 받았을 때 등장하는 말이다. 골대가 아니라 국기가 흔들리고, 선수의 반칙이 아니라 체제의 존엄이 문제 될 때, 스포츠는 사건이 된다. 사변은 그 사건을 역사적 필연으로 포장하는 이름인 것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