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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589] 북한에선 왜 ‘트레이너’를 ‘의무원(醫務員)’이라 말할까

2025-10-29 05:50:08

 2018년 동아시아컵에 출전한 북한 여자축구팀. 북한은 '트레이너'를 '의무원'이라 부른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8년 동아시아컵에 출전한 북한 여자축구팀. 북한은 '트레이너'를 '의무원'이라 부른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남한에선 체력훈련을 담당하거나 선수의 몸 상태를 관리하고 재활·마사지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트레이너(trainer)’이라 말한다. 북한에선 ‘트레이너’를 ‘의무원(醫務員)’이라고 부른다. ‘훈련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선수의 몸을 돌보고 회복을 돕는 ‘의무(醫務)’ 담당자로 지칭하는 것이다.

영어용어사전에 따르면 ‘trainer’ 어원은 라틴어 ‘trahere’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끌다, 당기다, 이끌다(to pull, to draw, to lead)’로, ‘train(훈련하다, 기차)’ 등 여러 영어 단어의 근원이 됐다. ‘trianer’는 기차라는 의미인 ‘train’에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 ‘-er’을 붙인 말이다. 이는 기차를 통해 승객들이 역에서 승차하여 정해진 역까지 데려다주는 ‘트레이닝(training)’ 뜻이 확장돼 한곳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시행하는 집체교육을 트레이닝으로 부르고 이러한 일을 하는 직업을 ‘트레이너’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마차 등 교통 수단을 이용해 활발한 교류를 해왔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주요 교통 수단이 마차였고, 산업혁명 이후는 기차와 자동차가 마차를 대체했다. 이러한 교통 수단을 통해 유럽은 같은 문화를 이루며 같은 어휘와 문법을 가진 언어체계로 발전했다. 동아시아 지역에선 고대 한·중·일이 같은 한자 문화권을 형성했으나 근대화가 늦어지며 주로 서양에서 만들어진 말들을 원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북한은 1960년대 ‘문화어’ 정책을 통해 외래어를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트레이너’ 같은 영어식 표현은 사대주의 잔재로 규정됐다. 모든 용어는 “근로인민이 알아듣기 쉬운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그래서 ‘코치’는 ‘지도원’, ‘감독’은 ‘책임지도원’, 그리고 ‘트레이너’는 ‘의무원’으로 부른다. 외래어를 버리고 우리식 말을 쓰는 일은 언어의 자주성을 세우는 정치적 행위였다. (본 코너 1581회 ‘북한은 문화어에서 스포츠 용어를 어떻게 바꾸었나’, 1583회 ‘북한에선 ‘감독’을 왜 ‘지도원’이라 말할까‘, 1584호 ’북한에선 왜 ‘심판’을 ‘재판원’이라 말할까‘ 참조)
북한 신문에는 이런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의무원 동무들이 경기 뒤 선수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물리치료를 진행하였다.” 이 한 문장 속에는 북한식 체육관의 철학이 녹아 있다. 경기의 승패보다 인민의 건강, 경쟁보다 보살핌을 앞세우는 언어의 뉘앙스가 읽힌다. ‘트레이너’라는 외래어 대신 ‘의무원’이라는 말로 바꿨을 때, 체육은 한층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임무로 탈바꿈한다. (본 코너 1551회 ‘북한에선 왜 ‘스포츠’ 대신 ‘체육’이라는 말을 많이 쓸까‘ 참조)

남한에서 트레이너가 개인의 전문성을 상징한다면, 북한의 의무원은 집단의 헌신을 상징한다. 한쪽은 ‘프로의 세계’를, 다른 쪽은 ‘복무의 세계’를 뜻한다. ‘의무원’이라는 글자 속에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북한의 언어 정책이 숨어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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