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궁은 2024 파리 올림픽에 걸린 금메달 5개를 모두 싹쓸이해 세계 최강임을 한껏 과시했다. 올림픽서 여자는 단체전 10연패를, 남자는 단체전 3연패를 각각 달성했다. 지금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양궁이지만 한때는 북한이 출전하는 올림픽에 메달 획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였다. 남북 선수들이 해방이후 분단 27년만에 처음으로 본격 격돌했다. 남북 가운데 어느 쪽이 이기느냐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던 분위기였다. 대한체육회는 북한 보다 열세하거나 북한에 이길 가능성이 없는 종목은 올림픽 출전을 못하도록 했다. 이제 막 싹을 피우기 시작한 양궁도 여기에 포함됐다. 양궁에서 북한을 이길 승산이 없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뮌헨 올림픽서 하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북한은 한국선수단보다 많은 10개 종목 82명(선수 62명, 임원 20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보다 2개 종목, 인원으로도 14명이나 많은 규모였다. 북한 출전 종목은 육상, 여자배구, 사격, 복싱, 역도, 유도, 레슬링, 양궁, 체조, 조정 등 이었다. 북한은 양궁에 남자 1명(김용호), 여자 3명(김호규, 주춘삼, 김향민) 등 모두 선수 4명을 출전시켰다. 북한은 뮌헨 올림픽 양궁에서 김호규가 여자 개인전서 2,369점으로 7위, 주춘삼이 2,349점으로 12위, 김향민이 2,275점으로 20위에 올랐다. 남자에선 김용호가 경기를 끝내지 못하고 도중 기권했다. 김호규는 1라운드서 1,195점을 기록하여 공동 5위를 유지했으나 2라운드서 부진, 7위로 밀렸다. 북한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도 출전해 장선용이 2,405점을 기록, 여자 개인전 4위를 했다
북한은 세계양궁연맹(FITA) 가입서도 한국을 앞질렀다. 한국은 1963년 FITA에 가입했으나 북한은 한국보다 2년 앞선 1961년 FITA 회원국 자격을 따냈다. 북한은 이미 1950년대부터 양궁을 도입, 보급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구 소련, 중국, 동유럽의 공산국가들과 교류하며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올림픽을 비롯해 중요 경기 국제무대에선 한국이 북한보다 앞서 진출했지만 양궁만은 후발주자로 북한을 추격하는 입장이었다. 한국은 1984년 LA올림픽서 처음으로 양궁에 출전했으니, 올림픽 무대 데뷔는 북한보다 12년 늦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