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양궁은 장애인이 정상인보다 한발 앞서 국제무대에 진출했으며 입상 성적도 먼저 올렸다. 상이군경들의 단체인 대한상이군협회는 1967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6회 세계척추장애자체육대회(ISMG)에 고근홍, 김근수 등 선수 2명과 한국 양궁 대부인 석봉근을 코치를 파견했다. 이 대회는 양궁 대회가 아니지만 한국 선수가 양궁 경기를 통해 국제스포츠무대에 진출한 첫 대회로 기록됐다. 한국은 이 대회에 매년 선수를 출전시켰는데, 1970년 대회서 이환공이 양궁 개인부 2위에 입상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따낸 최초의 양궁 메달이었다.
같은 해 열린 뮌헨올림픽서 궁도협회는 양궁이 올림픽 무대에 복귀하자 후보선수를 선발해 체육회에 올림픽 출전을 요청했으나 국제경쟁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양궁은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양궁여자 개인종합서 김진호가 첫 국제대회 금메달을 차지했다. 김진호는 1979년 이탈리아 푼타알라서 열린 제31회세계양궁선수권대회 개인전서 첫 세계대회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서는 1984년 LA 올림픽 여자개인전서 서향순이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선수들이 따낸 금메달을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모두 첫 출전한 무대에서 따낸 것이다.
장애인 양궁은 정상인보다 11년 앞서 국제무대에 진출했으며, 국제대회 금메달 획득도 정상인보다 8년이나 앞질렀다. 장애인 양궁이 빨랐던 것은 1960년대부터 대한상이군경회가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하며 신체장애의 불운을 겪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재활의욕을 북돋우는데 알맞은 스포츠로 양궁을 적극 보급했던 것이다. 양궁이 장애인들에게 알맞은 스포츠로 인정받은 것은 신체운동이 격렬하지 않고 심리적인 안정상태에서 정신집중만 하면 장애인도 얼마든지 경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군경은 양궁경기에 몰입하면서 실의에서 빠져나와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발사한 화살이 표적에 꽂히는 것을 보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74년 5월11일자 ‘휠체어의 양궁(洋弓) 준우승 정상인(正常人) 누른 주성규(朱成圭)씨’ 기사는 ‘불구(不具)의 몸으로 휠체어에의지한 주성규(朱成圭)씨(32·원호병원)가 10일 끝난 제8회전국종별양궁(種別洋弓)선수권대회일반부90m에서 2위를차지,눈길을 끌었다. 전방 모부대 근무중 지난 65년에 척추를 다쳐 제대한 주(朱)씨는 현실을 박차고 나갈 정신력을 기르기위해 3년전부터 궁도(弓道)를시작—.취미삼아 해온것이이젠 프로에 가까운 실력을 쌓았다. 71년 영국(英國)에서 열린 세계 신체장애자대회 양궁(洋弓)종목에서 김(金)메달을 따기도한주(朱)씨는 작년 종별대회때는70m 경기에서 2백62점을얻어 한국(韓國)신기록을 세우기도했었다.(이기록은 그후깨졌다)『정신을 집중시켜 잡념을없애고 건강을 위해서는양궁(洋弓)이 최상이다』고 밝힌주(朱)씨는『가까운 장래의 희망이라면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출천,꼭 메달을 따는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관련기사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report@maniareport.com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