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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626] 북한에선 왜 ‘야간경기’를 ‘등불경기’라고 말할까

2025-12-07 07:52:06

 지난 해 김일성경기장에서 공화국 창건 76주년(9·9절)을 맞아 4.25팀과 압록강팀 사이의 남자축구경기를 응원하는 관중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해 김일성경기장에서 공화국 창건 76주년(9·9절)을 맞아 4.25팀과 압록강팀 사이의 남자축구경기를 응원하는 관중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야간경기(夜間競技)’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이 말은 밤을 의미하는 ‘야간(夜間)’과 기술을 경쟁한다는 의미인 ‘경기(競技)’가 합해진 단어이다. 밤에 하는 경기라는 뜻인 야간경기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일본식 근대 스포츠 용어가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야간비행(夜間飛行)', '야간근무(夜間勤務)' 모두 일본식 조어의 영향으로 생긴 말들이다. (본 코너 666회 ‘육상경기에서 ‘경기(競技)’라는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참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31년 1월30일자 ‘산본박사(山本博士)의설계(設計)로 야간경기장실현(夜間竸技場實現)?’ 기사는 ‘조대리공학부장산본공학박사(早大理工學部長山本工學博士)는최근각종(最近各種)스포—스의이상(異常)한발달(發達)에따러서 경기장부족(競技場不足)을보충(補充)하기위(爲)하야 신궁경기장(神宮競技場)의야간조명(夜間照明)을실현(實現)하기에요(要)하는설계비용(設計費用)의계산(計算)을하여본바 산본박사(山本博士)는학문적흥미(學問的興味)로계산(計算)하엿다고말하나 약사만팔천원(約四萬八千圓)의경비(經費)로신궁경기장(神宮競技場)을야간(夜間)에사용(使用)할설비(設費)가될수잇다한다 그리하야 각경기회(各競技會)마다매명약칠십전(每名約七十錢)의입장료(入場料)로관중(觀衆)이일만삼천인(一萬三千人)만입장(入場)케되면그비용(費用)을전보(塡補)할수잇다는데 조명장치(照明裝置)는철골(鐵骨)의주(柱)를 경기장내각소(競技場內各所)에세워서매주(每柱)에다수(多數)의전등(電燈)을점(點)하면될수잇다한다 그런데현재미국(現在米國)에는 야간조명장치(夜間照明裝置)를설치(設置)한경기장(競技場)이이십개소이상(二十個所以上)잇다한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야간경기라는 한자어가 한국 근대 스포츠 용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북한에선 야간경기를 ‘등불경기’라고 말한다. 등불경기라는 표현은 그저 순화 정책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 안에는 북한식 언어의 구조와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북한은 1950년대 이후 외래어·한자어를 가능한 한 고유어로 대체하는 언어정책을 유지해왔다. 축구에서 코너킥은 ‘모서리차기’, 프리킥은 ‘벌차기’, 태클은 ‘공뺴앗기’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투박해 보이지만, 북한식 표현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가리켜 상황을 설명하려는 꾸밈없는 직설성이 깔려 있다. (본 코너 1606회 ‘북한 축구에서 왜 ‘코너킥’을 ‘구석차기’ 또는 ‘모서리뽈’이라 말할까‘, 1607회 ’북한에선 왜 ‘프리킥’을 ‘벌차기’라고 말할까‘, 1618회 ’북한 축구에서 왜 ‘태클’을 ‘공빼앗기’라고 말할까‘ 참조)
북한 언어는 ‘상황을 사물로 정의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가치를 판단하거나 개념을 덧씌우기보다, 눈앞의 사물을 직접 끌어와 표현하는 방식이다. 등불경기라는 말은 경기장에서 밤하늘을 밝히는 조명 불빛을 중심어로 삼아 경기를 부르는 것이다. 굳이 전문어를 고집하지 않아도 ‘등불 아래 하는 경기’라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북한 언어는 기술적 명칭보다 ‘불빛’ 자체를 서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말이 갖는 정서적 울림도 무시할 수 없다. 야간경기가 지닌 이미지는 기술적이다. 축구협회의 일정 편성, 방송 중계 시간, 조명시설의 수준이 논점이 된다. 그러나 등불경기라는 이름에는 소박한 풍경이 담겨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경기장에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그 불빛 아래 모여드는 장면이다. 북한 매체가 “등불밝은 경기장에서 터져 나온 함성” 같은 문장을 흔히 쓰는 것은 그런 서정적 이미지와 결을 같이한다. ‘불빛’이라는 단어 하나가 집단적 열기, 동원, 축제의 낯익은 정서를 동시에 불러온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회주의권 표현 방식의 흔적이다. 과거 소련과 동구권에서는 ‘프로젝터 불빛 아래 경기’처럼 조명 시설을 직접 언급하는 표현이 널리 쓰였다. 북한은 이를 다시 한 번 고유어의 틀로 번역해 받아들였다. 단순한 언어정책을 넘어, 사회주의 스포츠 문화의 이미지가 북한식 언어로 재해석된 것이다. (본 코너 1600회 ‘사회주의 관점으로 본 북한 스포츠 언어’ 참조)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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