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함께 되살아 난 조선체육회는 민족정기 표출과 맥을 같이 한다. 1920년에 출범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18년 동안 한겨레의 정신을 일깨우고 신체발달을 이끌었던 구심체였던 조선체육회는 다시 한민족의 힘을 모으고 분출하는 또 하나의 집합체로 등장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 시위 모습. 당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세력과 찬성하는 세력이 연일 시위를 벌이면서 결국 남북으로 갈리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이 저물어가는 12월 모스크바에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에서 채택된 신탁통치 결정은 온 나라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갔다.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임시정부와 연합국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을 뒤덮었고 한쪽에서는 찬성하는 세력이 연일 시위를 벌였다. 이와 함께 좌익과 우익의 대립도 점점 극렬해져갔다.
조선체육회도 그 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특히 과거 고려공산당과 손을 잡았던 사실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가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에서 인정해 주지 않아 무산된 적이 있는 여운형 회장의 경력이 색채시비를 불러왔다. 즉 요즘말로 하면 색깔 논쟁이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체육회 이사를 역임하고 체육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은 민족지도자다. 또 한편으로 여운형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존재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1933년 서상천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시절의 몽양 여운형 모습. [사진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새로 영입된 민족지도자의 면면은 좌우익을 망라했다. 범민족적 조직으로 개편된 조선체육회는 4월 15일 여운형 회장 이름으로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조선체육회는 3천만 민중의 체육을 지향하는 대표기관인 동시에 우리들의 공기(公器)다. 그러므로 이는 어떤 개인의 체육회도 아니요, 일개 단체에 종속된 체육회도 아닌 것이다. 만약 체육회의 회장이나 간부로서 정치적 색채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는 개인적 문제이고 체육회로서는 하등 관계할 바 아닌 동시에 체육회 자체가 색채를 갖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체육회는 불편부당임을 이에 성명함.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사회의 분열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의 와중에서 때마침 체육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한 성명서가 발표되면서 체육계 인사들은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각 체육단체의 창립과 재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체육의 정치적 중립 원칙은 미군정기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도 그대로 지켜져 민족체육의 위상을 견지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출처 대한민국 체육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