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역사의 깊은 숨결을 느낀다

김학수 기자| 승인 2022-10-27 06:27
“공주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최고의 고품격 역사문화 답사지입니다. 역사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하며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에 기반한 답사여행을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공주에서 문화유적과 역사현장을 보면서 옛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한 번씩 생각했으면 합니다.”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10월 15일,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109명이 공주 문화여행 답사에 나섰다. 2년여의 코로나19 팬더믹으로 중단됐던 정기 문화여행 답사를 재개한 것이다. 2019년 봄 강화도, 가을 예산 내포지역 답사에 이어 3번째이다. 공주 역사문화 답사여행에는 사학과 출신의 금융인이자 역사 해설가로 활동하는 홍석범씨(학군 17기)와 근현대사 분야 전공학자인 조규태 한성대 사학과 교수(힉군 23기)도 동행해 현장에서 해박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깊이있는 해설을 해줬다. 홍석범씨는 버스 3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ZOOM을 이용해 참가자에게 역사적인 현장에 관한 사전 설명을 해주었고, 조규태 교수는 동학농민운동 현장에서 현장 강의를 가졌다.
마곡사 5층석탑에서 포즈를 취한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일행.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마곡사 5층석탑에서 포즈를 취한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일행.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공주로 가는 관광 버스 안에서 홍순호씨(학군 13기)는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마곡사가 점차 가까워지자 옆 자리에 함께 앉아있던 후배 김태영(학군 16기)에게 “수십년전 마곡사를 찾아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공주에서 열차를 내려 한참을 먼지 날리는 비포장 길을 달려 가야했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 됐다”며 마곡사를 찾는 소회를 밝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다가 천안 JC서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옮겨 간 뒤 남풍세 TG로 빠져나온 버스는 잘 포장된 국도를 타고 40여분을 달려 강물이 시원스럽게 휘돌아가는 곳에 자리잡은 마곡사에 도착했다. 평지와 구릉지가 많은 충청도이지만 이곳은 충청도에서도 ‘강원도’ 같은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주위가 산으로 뒤덮혀 있는 오지였던 것이다.
마곡사를 찾는 이들은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는 말을 듣는다. 봄 풍경은 꽃이 아름다운 마곡사가 좋고, 가을 풍경은 단풍이 아름다운 갑사가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공주 문화여행 답사단은 반대로 가을에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에서 꽃보다 단풍을 보게됐지만 별로 아쉬워하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마곡사 경내와 주변 풍경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개인 마이크까지 준비한 가이드 홍석범씨는 먼저 마곡사라는 절 이름부터 설명했다. “서기 640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는데, 자장율사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삼과 같이 무성했다’하여 ‘삼 마(麻)와 ’계곡 곡(谷)‘자를 써서 마곡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신라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귀국해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이었던 마곡 보철화상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고 홍석범씨는 추가로 밝히며 삼과 관련한 설을 더 많이 따른다고 했다.

답사는 해탈문으로 들어가기 전 만나는 영산전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산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한다.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현판은 세조가 방랑시인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고 한다. 세조는 주변 산세에 반해 영적인 산을 생각하며 불전 앞에 서며 이런 이름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

마곡사는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깊다. 원래 김구는 동학 신도였다. 대한제국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한 뒤 승려로 위장한 채 마곡사에 숨어들었다. 절에서 3년동안 수행자 생활을 했다. 그때의 상황은 ‘백범일지’ 상권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 갑사에서 점심을 사 먹고 있었더니, 동학사로부터 와서 점심을 먹는 유산객(遊山客, 산으로 놀러다니는 이) 한 사람이 있었다. 인사를 하니 공주 사는 이서방이라 했다. 나이가 마흔이 넘은 선비로,유산시를 들려주는데 시로나 말로나 퍽 비관을 품고 있는 듯했다. (중략) 이서방이 다정하게 내게 청했다. ”노형이 이왕 구경을 떠난 바에는 여기서 40여리를 가면 마곡사란 절이 있으니 그 절이나 같이 구경하고 가시는 것이 어떠하오.“ 나는 마곡사란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우리 집에 ‘동국명현록’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그 책에는 마곡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절에서 만난 이서방이라는 사람이 김구에게 마곡사를 추천했으며, 그런 인연이 결국 그가 머리를 깎고 마곡사에 입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구는 해방 후 돌아와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 앞에는 ‘김구는 위명(僞名, 가짜 이름)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쓰인 푯말이 꽂혀있다.

서강대 학군단(ROTC) 23기 출신인 조규태 한성대 사학과 교수가 동학혁명 위령탑 앞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서강대 학군단(ROTC) 23기 출신인 조규태 한성대 사학과 교수가 동학혁명 위령탑 앞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동학농민군 최후의 싸움터 우금치


우금치라는 단어는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 동학혁명과 함께 가장 비장한 말로 기억된다. 동학농민군 최후의 싸움터였기 때문이다. 우금치는 공주시에서 부여 방향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다. 이 나라 어느 산에나 있음직한 야트막한 산이름이 우금치이다. 소만한 크기의 금이 묻혔다고 해서 우금치(牛金峙)라고도 하고, 도적이 많아 날이 저물면 소을 몰고 넘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우금(牛禁)고개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터널이 뚫린 옆 길로 올라가면 우금치 전적지가 있다. 전적지에는 우금치 동학혁명 위령탑 아래 ‘우금티 알림터’라는 작은 문화관이 방문객을 맞는다.

동학혁명 위령탑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다. ‘5·16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농민국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게 된 만큼…“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했던 것이다.

가이드 홍석범씨를 대신해 조규태 교수가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 전투에 대해 설명했다. “동학농민운동은 당시 청나라와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일본, 미국, 영국 등의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국제 갈등 속에서 터진 우리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일본 연합군과 우금치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끊임없이 우금치를 향해 내달렸고, 연합군은 우금치 고개 위에서 기관총 등 막강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퍼부어 시체가 산에 가득했다”는 그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공주 공산성에서 설명을 듣는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일행.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공주 공산성에서 설명을 듣는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일행.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비단(錦)’처럼 아름다운 금강에 뒤지지 않게 아름다운 공산성


공주 시내에서 천천히 즐기며 산책을 하기에 가장 좋은 코스는 공산성이다.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배산임수 지형에 공산성이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건축한 ‘비운의 성’이다. 서기 475년 서울 잠실 한산성에서 고구려에 패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백제 5명의 임금이 64년간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한 산성이다. 총연장 2660미터의 성곽으로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 요지이다.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길은 금강교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충청도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공덕비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금서루에 이른다. 공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금서루에서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쌍수정 광장에 다다른다. 쌍수정 광장에서 조금 더 오르면 공산성의 남문 진남루에 이르고,그 길을 따라 더 오르면 동문터에 이른다. 영동루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금강을 조망하는게 일품이다. 가파른 성벽길을 걷는 것은 불안해 보이지만 매우 운치가 있다.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을 공주 문화여행 답사 가이드를 맡은 전 신한은행 지점장 홍석범씨(사학과 출신 ROTC 17기).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을 공주 문화여행 답사 가이드를 맡은 전 신한은행 지점장 홍석범씨(사학과 출신 ROTC 17기).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제공]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무령왕릉


가이드 홍석범씨는 무령왕릉을 찾기에 앞서 유네스코에서 2015년 무릉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켜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높게 평가받았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산재한 왕릉 중 왕릉의 주인공과 조성 경위를 기록으로 남겨 놓은 곳은 매우 드문데 1천5백여전의 백제 무령왕릉은 조성경위를 출토물품에 기록했다고 한다.

‘무령왕 23년인 523년, 무령왕이 62세로 사망했다. 성왕 3년인 525년 8월12일, 왕의 3년상을 마치고 매장했다. 성왕 4년인 526년 11월, 무령왕비가 별세해 가매장했다. 성왕 7년인 529년 2월12일, 왕비의 3년상을 마치고 왕과 합장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역사유물 발굴사상 최고의 사건이었다. 5호분과 6호분 사이에 물이 새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사를 벌이던 중 기념비적인 무덩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안타깝게도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유물들을 훼손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당시 발굴을 주도했던 전 국립박물관장 김원룡 박사는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 위해 무리를 하다 유물들을 소홀히 다루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2019년 천황에서 스스로 물러난 일왕 아키히토는 일본 천황 집안이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둔 68세 생일날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칸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백제 시대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양국간 혼사나 경제 협력도 이루어졌던 사실을 추정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가 상당히 오래됐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무령왕릉 답사에서 워낙 많은 백제시대 이야기를 듣다보니 웅진백제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방문은 주마간산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국립공주박물관의 많은 소장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다음 기회에 개별적으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8시간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역사도시 공주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마곡사 맛집 차령산맥

차령산맥의 정갈한 더덕구이 정식
차령산맥의 정갈한 더덕구이 정식


천년 사찰 마곡사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 절 입구에 많은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답사팀 일행들이 들른 곳은 차령산맥이라는 한정식 집이었다. 이곳은 층남 공주의 향토음식 경연대회에서 충남도지사상을 수상한 맛집으로 유명하다. 이미 행사 기획을 준비해 후배들이 먼저 시식을 해 합격점을 받았다. 널직한 식당 공간을 단체팀을 받는데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대표 메뉴는 해물파전과 더덕정식이다. 해물파전과 먹걸리 한잔을 곁들이며 정갈하게 만든 산채 나물을 비롯하여 향이 넘치는 더덕과 버섯이 어우러진 더덕버섯구이가 일품이다. 된장국에 백반정식이 굴비와 함께 나오는데 이것도 맛이 있어 보였다. 사찰주변 음식에 맞는 메뉴들이었다.

109명의 서강대 학군단 총동문회 가족 일행은 식사 내용에 만족하며 유쾌한 점심 한때를 즐길 수 있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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