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국 양궁은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1959년 체육교사였던 석봉근(1923-1996) 선생이 서울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상에서 양궁을 처음 발견한 이후 손수 교본 등을 제작하며 제자들에게 양궁을 가르친 것이 한국 양궁의 시작이었다. (본 코너 1181회 ‘왜 양궁이라 말할까’ 참조)
양궁 선수가 한국 대표 선수단의 일원으로 선발돼 처음 출전한 것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김진호는 방콕 아시안게임서 여자개인종합서 금메달을 차지하고 여자단체서도 은메달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진호는 1979년 세계 선수권까지 4관왕을 달성하여 신궁 계보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 양궁은 1984년 LA 올림픽서 서향순이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서향순은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비체급 경기서 나온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 서향순이 레슬링, 복싱, 유도 등 한국 스포츠의 체급 투기 일변도 현상을 타파한 후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비체급 경기서 금메달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후 한국스포츠는 자연스럽게 양궁, 사격, 배드민턴, 펜싱 위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 양궁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이 올림픽 금메달 결정전보다도 어렵다’는 말이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도 다음 올림픽 출전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선발 경쟁이 치열하다. 훌륭한 교육 체계와 출중한 실력을 갖춘 선수층, 철저히 실력 기반으로 뽑는 공정한 선발 방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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